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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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백수탈출기.

영원한 화자 2014. 4. 16. 02:54


백수탈출의 역사.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도 취직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들은 물론 친구들 앞에서도 대학원에 갈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그러나 확신은 서지 않은 상태였다. 계속 공부를 할 만큼, 그리고 공부하고 싶어했던 '국제정치'를 계속 공부해나갈 만큼의 지식도 역량도 갖고 있지 않았다. 어찌보면 막연한 희망사항이었다.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대학원 접수가 시작됐다. 망설이다 지원서를 작성했다. 준비된 건 하나도 없었다. 학업계획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감도 안 왔고, 주변에 도움 받을만한 사람도 없었다. 준비가 미흡했던 만큼 광탈은 당연했다. Y대에서 받았던 무시, 멸시, 등한시는 아직도 생생하다. 2012년 상반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시원하게 원서비 21만원을 허공에 날리고-그 돈으로 술이라도 사먹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취업전선에 쭈뼛쭈뼛 발을 들이밀었다. 그러던 찰나 기대도 하지 않던 모 공기업 인턴에 합격했다. 대외적인 이미지가 거의 끝판왕 수준의 회사였기 때문에 인턴 합격했을때 난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의 축하를 받았다. 그렇게 인턴 생활이 시작됐다.


인턴 생활은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 일을 통해서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다.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번역업무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영어도 늘었고, 학교에서 배운 국제정치, 국제경제 지식을 활용하며 그 외연을 더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꼭 학위를 하지 않아도 이런 회사라면 계속 공부도 할 수 있고, 그 공부가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그래서 입사가산점 기준인 6개월을 훌쩍 넘겨 약 9개월 간 일을 했고 그 회사 입사를 목표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2013년 6월 30일을 끝으로 본격적인 취준생 a.k.a 백수가 되었다.


주요 과목이 국제경제였기 때문에 반년 이상을 거시경제학, 국제경제학 관련 책과 기사, 보고서들을 달고 살았다. 내가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의문이 일었지만 꾸준함의 진리를 믿었다. 하면 된다. 경제학 그래프만 보면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끼던 내가 경제학 이론을 설명하며 척척 그래프를 그릴 수 있게 됐다. 한국, 미국, 일본, 중국의 주요 경제지표와 무역지표 등을 달달달 외웠다. 각국의 경제정책, 외교정책을 외웠고, 수많은 논술 연습지와 연습장을 채웠다. 글씨도 중요하다길래 글씨 연습까지 했다. 영어면접이 있어 아침에는 전화영어를 하고 도서관으로 출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가 고등학교 이후로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간인 것 같다. 


결과적으로 시험에선 탈락했다. 컨디션 조절, 가장 문제가 됐었던 시간 및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 실력이나 지식보단 운이 중요한 시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어지간한 고시생 보다 잘 쓸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여러 스터디에서 긍정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았었다. 행시, 외시 준비했던 친구들에게도 내가 오히려 가르쳐 줄 정도였으니까 자신있었다. 그렇지만 난 언제나 이런 중요한 시험에서 운이 없다는 징그럽도록 징그러운 징크스가 있다. 어쨌든 탈락. 내 인생의 분기점이 되길 바란 2013년의 9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멘탈 붕괴의 시간을 가졌다. 한 달 여를 놀았다. 뭘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을만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아마 책을 좀 읽고, 라디오스타, 무한도전 등의 오락프로를 다 챙겨보고 영화 몇 편을 봤을 것이다. 시험 공부하느라 제대로 공을 들이지 못한 자소서들은 시원하게 탈탈 털리고 있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이 괜히 있는게 아닌데 그라믄 안된다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멘탈을 추스리고 뒤늦게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10월 중순~말 정도 였기 때문에 대기업들의 채용공고는 거의 끝난 시점이었고 중견, 외국계 기업에 조금씩 자소서를 들이밀고 있었다. 여지없이 털리고 있던 찰나 한 외국계 기업에 첫 서류통과를 통보받았다. 어찌나 떨리던지. 겨우 서류통관데 인생역전 드라마를 펼칠 수 있을것 같았다. 무려 일주일 동안 면접을 준비했다. 어느새 탄소섬유 시장의 전문가가 돼있었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상상의 날개를 펴며 밤잠을 설쳤다.


모든 '첫'은 좋을 수가 없는 것인가. 첫면접에서 나는 또 시원한 고배를 마셨다. 토론면접은 진짜 기가 막히게 봤다고 생각했는데 블라인드 면접에선 너무 긴장한 나머지 준비한 걸 하나도 말하지 못했고, 실수까지 저질렀다. 뭐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더 열심히 자소서를 썼다. 그 때를 기점으로 서류통과 횟수도 늘어났고 면접횟수도 늘어났다. 둬 군데의 회사에 합격했지만 직무나 연봉, 회사 규모 등이 맞지 않아 가지 않았다.


겪어보니 모든 것이 '운'이다. 주변에 대기업, 중소기업, 외국계 기업에 간 친구들을 보면 그들이 몹시 뛰어나다거나 뒤쳐져서 그곳에 간게 아니다. 솔직히 운이라고 생각했다. 운이 있거나 없거나. 기약없고,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이 게임에서 누가 더 강한 멘탈로 버티고, 경제적으로 버티느냐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알면서도 멘탈이 털리는게 취업인 것 같다. 연초부터 강력하게 털리고 나니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매우 피로해졌고 엄청난 자괴감에 빠졌다. 그때 즈음 이 회사의 채용 공고를 봤다.


알지도 못하는 회사였다. 조건에는 '1. 원어민 수준 영어회화 가능자, 2. 제2외국어 가능자, 3. 인턴쉽 경험자, 4. 경력 3년 이내자'를 원했다. 요구 전공은 상경/공대였다. 저 중에 내가 부합하는 건 단 하나 인턴쉽 경험자였다. 당연히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취업스터디를 같이하던 친구들이 한 번 써보라고 부추겼다. 지원 마지막날 적당히 비벼쓴 자소서를 제출했고 당연히 붙으리라는 상상은 하지도 않았다. 전공도 세부조건도 제대로 만족시킬 수 있는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1차 면접에 붙었다. 인성면접이었기 때문에 별다를게 없었지만 대진운이 좋았다. 같은 조였던 사람들이 면접 경험이 별로 없어보였다. 2차 면접에도 붙었다. 영어면접이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떨어질거라 생각했다. 한국어 질문엔 잘했다 싶을 정도로 답했지만 영어 질문엔 이불킥을 할 정도로 횡설수설했다. 합격 소식을 듣고는 왜??????라는 물음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해외대 출신들, 외국에서 태어난 지원자들이 모두 없어지고 나와 다른 한 사람만이 3차 면접에 참가했다. 3차 면접에서도 대진운이 좋았다. 이번에도 역시 그렇게 면접 경험이 많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옆에서 듣는 내가 불안할 정도로 답변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생각할 시간도 많았고 옆 사람들을 보며 조심할 점들을 리마인드 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어제 합격 소식을 받아들었다. 사실 좀 고민을 했다. 너무 느닷없는, 예상치도 못한 결과라 얼떨떨한 것도 있고, 그 외에 규모나 연봉면에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기준에는 성에 차지 않은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어디 내 스펙에 그런 정도의 회사에서 해외영업 포지션에서 일할 수 있겠나 싶었다. 이렇게 백수 생활 청산에 종지부를 찍게됐다.


이게 내 모든 백수생활의 역사다. 써놓고 보니 정말 다 담았다. 인턴을 끝내고 10개월 만이다. 거의 가족처럼 지내는 선배누나는 나한테 그런 말을 했다. 자기가 아는 백수 중에 가장 바쁜 백수가 나라고. 혼자 있게되면 늘어지고, 나태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터디를 만들었고, 사람을 만나고, 밖에 나가서 공부하려고 애썼다. 그런 노력을 알아준게 아닌가 싶다. 



백수의 한이 가득 서린 블로그였는데 이젠 직장인의 애환과 분노가 서린 블로그가 될 듯 하다. 얼마전 한 글에서 '직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한 것이라는 문구를 봤다. 방법은 달라졌지만 국제정치경제를 공부하고 싶다는 방향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새로운 걸음을 내딛을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