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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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공간/ijuswanaseing

씀.

영원한 화자 2014. 9. 15. 22:41


학생일 때, 백수일 때 머릿속은 끄집어 내지 않은 글감 투성이었다. 정치적인 것이든 문학적인 것이든 수첩과 노트에 아이패드와 핸드폰 속엔 메모가 지층처럼 켜켜이 쌓였다. 학생 때도, 백수 때도 남들보다 바쁘게 살았지만 그 와중에도 공상의 순간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신세한탄만이 사지육신에 가득하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문학보단 월급에, 정치보단 경제에 더 빠르게 반응한다. 한 달에 많게는  대여섯권 읽던 책은 한 권으로 줄었고, 이제는 신문이나 칼럼 같은 것들도 잘 챙겨보지 않게 되었다. 학교 문을 공식적으로 나서는 순간 내 삶에 '낭만'따위는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기 시작했다.



책상과 방바닥에 수북히 쌓인, 문학과 사회과학 책들은 그렇게 사라져가는 낭만을 붙잡기 위한 나의 애처로운 투쟁의 토사물이 아닌가한다. 건드리지도 못할 책들을 바라보며, '아직 나는...' 이라며 안도감을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 취업의 관문을 넘어 이제 사회통념적으로 남은 결혼과 육아라는 두 가지의 관문. 이 관문마저 통과하게 된다면 애처롭게 부여잡고 있던 낭만이라는 것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까. 하긴 희끗한 새치와 주름을 가지고 낭만따위를 운운하는 것도 좀 우습겠다.



그렇지만 쓴다는 것을 놓을 생각은 없다. 누구들처럼 잘 쓰는 재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가장 잘 하고 싶고, 계속 하고 싶은 것(일, 이라고 쓰고 싶지만 나에게 일work은 아니니)이니까. 몇몇 작가처럼 늦은 나이에 등단을 하고 문학적 성과를 이루는 걸 보며, '혹시 나도?', 라는 막연한 공상을 해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쓰라, 라던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쓸 것이 없으면 쓸 것이 없다는 것을 쓰기위해 씀. 내 처지가 이래가 글들이 우울뻑쩍지근합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행복하시길. 여전히 청춘이시길. 내일 또 하루 설레시고, 꿈꾸시길. 그래서 언젠가는 원하던 곳에 도착해있길.


나의 이 고민도 청춘의 흔적이겠지요, 라며 아직 20대라고 자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