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우연의 즐거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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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즐거움.

영원한 화자 2014. 8. 16. 23:49


천성인지 습관인지 난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려 하는 편이다. 고등학교 때도, 군대에서도, 직장인이 된 지금도 일과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오늘 할 일을 수첩이나 노트에 적는 일이다. 중요도 혹은 시간 순서대로 적어 내려가며 수시로 그것을 체크해가며 빠트린 것은 없는지, 더 추가해야될 것은 없는지 본다. 영화도 즉흥적으로 가서 보는 건 드물다. 항상 뭘 볼지 정하고 예매를 한다. 쉬는 날에도 큼지막하게 오늘은 뭐뭐뭐를 해야겠다 머리 속으로 대략 정해 놓는다. 즉흥적인 여행은 있을 수 없다. 갈 곳과 잘 곳, 먹을 곳, 교통편, 예산을 정해야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을 떠날 때 내 가방은 친구들 것보다 컸고, 다들 난감해할 때그 속에서 이래저래 쓸모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기도 했다.


오늘은 회화 학원을 마치고 강남 알라딘 서점에 들렀다. 이미 방엔 읽지 않은 책들이 차고 넘치지만 서점과 도서관에 들르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즐거움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책도 계획적으로 사는 편이다.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 언론에 소개되서 흥미를 끄는 책들을 노트나 스마트폰 곳곳에 적어두고 생각나는 대로 사거나 빌려보는 편이다. 그렇다 보니 우연히, 충동적으로 읽는 책도 드물다. (적고 보니 되게 빡빡하게 사는 것 같다.)


오늘 평소의 나와 다르게 생각에도 없는 책 두 권을 샀다. 하나는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 다른 하나는 박상익 교수의 <번역은 반역인가>이다. 정확히 따지면 번역과 위화에 대한 관심은 쭉 있어왔기에 100% 충동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생각없이 책을 집어들었기 때문에 나에겐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연처럼 읽게되는 책들이나, 보게되는 영화들, 만나게되는 사람들은 참 즐겁다. 책의 경우에는 내가 전혀 관심없던 분야에 대해 알게된다거나-예를 들자면 박혜천의 <인터페이스 연대기>가 그랬다-, 영화의 경우엔 내용이나 평을 전혀 알지 못하고 보는 인디 영화들이 의외의 재미와 예상치 못한 서사를 보여주며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들도 그렇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지인들과의 짧은 스침도 즐겁지만, 이곳 저곳에서 우연히 맺는 인연들은 그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추해 보면 슬며시 웃음짓게 하는 순간을 선물한다.


요즘은 꽃보다 청춘을 즐겨본다. 남미여행 했을 때를 떠올리며 여행도 하고 돈도 버는 그들을 하염없이 부러워하고 있다. 그러다 문득 그때 우연히 만나 함께 여행하고, 함께 밥을 먹었던 분들이 생각났다.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여행을 떠난 부부, 나처럼 워킹홀리데이를 해서 모은 돈으로 남미일주를 하고 있던 누나, 그저 삐끗한 줄 알았던 내 손가락을 보며 골절이라고 알려주며 연을 맺고, 한 달 가까이 함께 여행한 형 등등등. 낯선 곳에서 만났지만 부랄친구들이나 부모님들과 할 수 없었던 속내까지 얘기하며 여행자의 설레임과 외로움을 즐기던 사람들. 페이스북에 슬며시 인삿말을 올렸더니 역시나 그들 모두 그 때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책을 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머릿 속엔 계속 '우연'이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들이 줬던 즐거움을 생각하며 이유없이 기분이 좋았다. 선형적으로 잘 정리된 생활도 좋지만, 그렇게 빡빡한 일상은 우연이 틈입할 수 없는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다. 열심히, 성실히 살되, 언제나 여유를 잃지 말자. 내 삶에 그런 우연의 즐거움이 자주 찾아올 수 있게 여유가 있고 공간이 있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