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박해천 - 콘크리트 유토피아 본문

사사로운 공간/읽다

박해천 -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원한 화자 2012. 7. 25. 22:14

1. 한국의 부동산 문제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세 권의 책을 권하고 싶다. 

   


아파트 공화국

저자
발레리 줄레조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07-02-0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외국인의 시선으로 새롭게 바라본 대한민국 아파트 대한민국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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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계급사회

저자
손낙구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08-08-1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당신의 부동산 계급은? 부동산이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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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저자
박해천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1-02-2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아파트를 바라보는 다중의 시선, 혼종의 사유!경계 간 글쓰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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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실 이 책의 첫 장은 좀 난해하다. 건축과 철학, 정신분석학, 문학, 과학에서 사회학까지 온갖 학문을 아우르며 픽션이란 이름으로,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진입하기 이전의 한국을 훑는다. 그렇지만 수 없이 난무하는 학자의 이름과 현학적 서술은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물론 적당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즐길 수 있겠지만, 그 아득함에 주늑이 들었다. 그나마 1장의 중후반부터는 약간의 한국사와, 아파트사(史)의 시초를 보여주기 때문에 견딜만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엑기스는 2장 '아파트의 자서전'부터라고 생각한다. 지리학자인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과 비슷한 관점에서 한국의 아파트 확산과 아파트 그 자체, 그리고 아파트의 사회학을 서술하고 있지만, '디자인 연구자'답게 조금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아파트의 구조와 인테리어, 소품 등을 관찰하고, 입주자들의 의식과 행동을 분석하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구석구석 배치된 사진자료들도 꽤나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어디서 구했는지 의문이 들법한 60~70년대의 광고부터, 반포, 압구정, 잠실 등의 아파트 단지 항공사진-그 끔찍한 스펙터클이란!-까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또 하나 이 책의 미덕이라면 방대한 양의 자료조사에서 비롯된 인용문들이다. 저자는 주로 설명-예시(인용문 혹은 사진)의 형태를 취하는데, 그가 인용한 문장들은 신문기사나 잡지기사는 물론 시대상을 그린 소설도 적지 않은 양을 차지하고 있어 색 다른 즐거움을 주고 있다.


3. '말하는 건축가'를 보고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건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은 특히 서울은 참으로 끔찍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개발은 보편적 인간을 위한 개발이어야 했지만, 한국의 그것은 특정 계층과 특정 정치권력을 위한 개발이었다. 결국 인간의 기본요소라는 집에서 인간이 소외되는 역설이 발생했고, 그것이 온 국민의 삶과 경제를 규정하는 절대요소가 되어버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바로 대한민국인 것이다. 78년 김수근이 지적한 그 문제가 단 한 치의 개선없이, 한국인의 삶부터 의식 저 깊은 곳까지 지배하고 있는 '아파트'는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저녁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내 꿈이 이루어지는', '인간이 먼저'인 나라는 바로 아파트 문제가 해결된 나라일 것이다. 차기 정부에선 이 지긋지긋한 욕망의 유토피아를 해체했으면 좋겠다.




발췌

p.63 ...흥미로운 것은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의 여갈이었다. 그것은 잠시 ㄹ대다닞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 단지는 강남 아파트의 거주자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욕마의 정점인 동시에 맨션 트라이앵글의 거주자들이 강남으로 진입하는 연결 통로였다. 한편 198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강남의 아파트 단지는 한강변의 횡축에 덧붙여, 강남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종축을 보강했다. 듬성듬성 끊기긴 했지만, 개포동에서 출발해 도곡동과 대치동을 거쳐 압구정동으로 도달하는 아파트 단지들의 축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종축과 횡축을 따라 아파트들이 건설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분포가 완성되었다. 전용면적 25.7평이라는 국민주택 규모의 상한선 바로 밑에 놓인 25평형과 32평형, 지역난방과 도시 가스를 갖춘 12층 이상의 고층 아파트를 평균값으로 삼는 분포도가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설계자들은 누구를 염두에 두고 이 분포도를 그렸던 것일까? 달리 말하자면, 강남의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설계자들의 계획을 몸소 실현해줄 행위자들은 누구였을까? 설계자들은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인구 통계학적 집단으 주목했다. 이후에 '신중산층'이라는 이름을 얻게 될 그들은 1970년대 압축적인 경제 성장의 인적 견인차이자 실질적 수혜자로 부상하던 '조국의 근대화'의 자식들이었다. 1940년대 지방에서 태어나 이제 막 출세의 초입에 들어서려는 찰나에 있던 이들, 그들은 유년기에 625전쟁을 결험했고, 전설의 보릿고개를 넘어서 어렵게 지방 명문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4.19를 목격한 뒤,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해 한이협정 반대시위를 경험했으나 반공주의의 장벽 덕분에 급진적인 정치 이념의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업화 경제 성장의 격랑으로 극대화된 사회적 이동성을 십분 호라용해 정부 관료와 대기업 관리직, 고소득 전문직과 자영업자로 성공 신화를 써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p.66

...내가 만들어낸 도시 경관이 군사 기지처럼 보였던 것은,실제로 내가 군사 기지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일차적으로 그런 특성은 "총량주의적 목표의 달성을 위해 군사 작전을 치루듯이" 진행되었던 대규모 건설 과정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거기에서 주거 단위는 "면적에 따른 표준 설계도"로, "건물은 건축 자재의 목록으로, 단지는 토목 공사의 일정표"로, 그리고 앞서 잠실의 사례가 보여주었듯이 "아파트 입주자는 통계 수치의 일부로 접근되었다". 그런데 내가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방식에 따라 군사 기지를 닮은 모양새로 만들어졌따면, 설계자들이 구상에서 완공까지 일관되게 군사적 관점을 유지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설계자들은 기존의 아파트 모델이 지난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좀 더 유연한 인공 환경의 복합체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목표로 설정한 것은 미래의 신시가지에서 자생적으로 증식하며 구도심을 포위할 수 있는 확산의 전략적 모델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확산은 대량 복제를 통한 특정한 주거 모델의 확산뿐만 아니라, 그 모델에 내재한 새로운 습속의 확산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p.67

  ....신중층산층에 속했던 이들은 이넝하고 싶지 않겠지만 나(아파트)는 군사적 시선의 진두지휘 아래, 그들에 대한 임상 실험이 이뤄진 핵심 장소였다. 그 실험은 지금의 강남 지역에 대규모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되었는데, 나는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적어도 두 가지 차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나는 감각의 생산양식을 구축해 거주자들이 특정한 시각성의 논리를 체화하도록 독려했고, 일상성의 프로그램을 제공해 독특한 구별짓기의 인지적 알고리즘을 내면화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그들 내면의 윤곽을 주조하는 거푸집이었던 것이다.



p.95

 ...이런 맥락에서 어느 보수적인 사회학자는 이 시기 수도권 신도시에 세워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출현을 한국 사회의 정치적인 변곡점으로 주목했따. 그의 지적대로 이 아파트들의 거주 집단 상당수는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추동한 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거세지자 점차 급진적인 정치 이념으로부터 등을 돌린 채 "한국 사회의 이념적 좌경화를 막는 결정적인 방파제 역할"을 떠맡기 시작했다. 그 사회학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처음에는 민주화의 견인차 역할을, 그 다음에는 파수꾼 역할을 수행했다. 아파트 구입을 전후로 그들의 사회적 역할은 완연히 다른 모양새를 취했던 것이다. 사실 어느 세새든지 젊은 중산층이 나이르 더해가면서 기존 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의 주장에는 신선한 대목이 없지 않은데, 정치적 입장의 극적인 선회를 추동한 '반혁명'의 매개체로, 그리고 사회적 불만의 뇌관을 제거하고 체제의 안위를 도모하는 궁극적정치적 해결안으로 나를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는 내가 성취한 바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나를 구상하는 데 바탕이 된 설계자들의 '군사적 시선'을 상기해본다면, 클라우제비츠의 경구에 약간의 허풍을 가미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파트는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다"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