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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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공간/ijuswanaseing

셔츠.

영원한 화자 2016. 3. 25. 00:50


봄이 됐으니 옷정리와 대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행거를 쳐다봤다. 아랫 칸엔 셔츠가 한 가득이다.

 

유독 옷중에 셔츠가 많다. 학생 때도 주로 셔츠를 입었다. 정확히 말하면 셔츠위에 니트를 입거나 티셔츠를 껴입었다. 지금은 그나마 살이 많이 쪘지만 그땐 70kg도 되지 않았다. 워낙 마른데다 어깨도 좁은 체형이라 항상 옷을 여러 겹으로 입었다. 후드티 안에도, 맨투맨 안에도 셔츠를 입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예쁜 셔츠를 보면 사고 싶어진다. 군대 말년 때 전역하면 사야할 리스트를 적었는데 그때도 빠짐없이 적었던 게 셔츠였다. 그야말로 셔츠 성애자였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집착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셔츠를 샀다. 처음엔 빨래를 자주 못하니 귀찮은 맘에 여러 벌을 샀는데 나중에는, 이뻐서 샀고, 아울렛에 갔더니 80%를 후려치길래 샀고, 직구를 하다가 세일을 하길래 샀다. 고백하건대 아직 한번도 입지 않은 셔츠도 있고, 내가 생각해도 이건 해도 너무해서 팔려고 놔둔 셔츠도 있다. 스트레스를 셔츠로 풀었나 싶을 정도다.

 

셔츠를 입으며 가장 귀찮은 것은 세탁과 다림질. 요즘은 세탁소에서 990원이면 세탁에 다림질까지 해주니 땡큐지만 회사에 다닐 땐 세탁물을 찾으러 갈 시간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허겁지겁 달려 도착한 세탁소 앞에서 내일은 꼭 찾고 말거야를 외치며 돌아섰던 적도 많았다. 세탁소 가는 것도 귀찮을 때가 있는데 그땐 그냥 집에서 세탁기로 돌렸다. 피곤해 죽겠는데도 손목과 목에 찌든 때가 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화장실에 셔츠를 수북히 쌓아두고 칫솔에 셔츠 전용 세제를 묻혀 초벌 빨래를 했다.

 

세탁기에 돌린 셔츠가 마르면 이제 다림질 차례.  다림질을 할 때마다 빨래는 안해줘도 좋으니 다림질만 좀 싸게 해주는 데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 입는 셔츠는 그냥 세탁소에 맡겨버렸는데, 맘에 드는 셔츠나 비싼 셔츠는 세탁소에 맡기면 금방 헤져버려 그런 건 대체로 집에서 빨고 내가 다려 입었다. 그렇게 깔끔하게 셔츠 대여섯 벌을 다리고 나면 한 주가 마무리 됐다. 이것도 귀찮아서 다리지 않는 셔츠를 대충 툭툭 털어서 입고 가는 날도 많았는데 그런 날은 항상 셔츠처럼 왠지 나도 쪼글쪼글 해지는 것 같았다. 짱짱하게 다린 셔츠와 단정하게 맨 넥타이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기게 했지 아무렴. 그렇게 입고 나간 셔츠와 넥타이를 칭찬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런 셔츠들이 몇 달째, 이제 거의 반년 째 옷걸이에 방치되고 있다. 아주 가끔 괜히 꺼내서 입고 나가 보기도 한다. 앞으로 입을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역시 너무 많이 샀어, 라고 자책하기도 한다. 한동안 입을 일이 없는 것들은 깨끗이 빨아서 깊숙히 넣어 놓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