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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화자
진중권 - 호모코레아니쿠스 본문
내 인생에 작정하고 미친듯이 책만 읽었던 적이 몇번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학교 1, 2학년 때다. 도서관 책상에 앉아, 기숙사 침대에 누워 그득하게 책을 쌓아놓고 읽던 그때는 요순시대 만큼 내 몸과 마음에 평화가 넘쳐흐르던 때였다. 당시-그리고 지금도-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줬던게 바로 진중권이다. 고등학교 때였던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를 읽으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은 대학교때로 이어져 그의 책과 칼럼, 인터뷰를 있는대로 섭렵했고, 학교에 강의를 하러왔을 때는 글쓰기에 대한 질문까지 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나는 그야말로 진중권 빠돌이였다. 언제나 그의 주장이나 행보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사유 방식, 날카로운 시각, 저술 활동 등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한국'과 '한국인'이 가진 특성을 몇 가지 키워드와 사건들을 중심으로 진중권이란 필터를 통해 해석한 책이다. 진중권의 책을 많이 본 사람들은 약간의 동어반복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겠지만 의미없는 자기복제가 아닌 사안을 바라보는 한 가지 시각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큰 거부감은 없다.
사실 이 책은 2007년에 발간된 책으로, 따지고 보면 나온지 10년이 다 돼가는 책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칼럼을 모은 책들은 특히 시의성을 띄는 글들이 다분하기 때문에 출간된지 오래 된 책들은 읽기가 꺼려진다. 그러나 이 책은 예외라고 말하고 싶다. 일어난 사건이 조금 오래됐을 뿐이지, 그 사건을 통해서 보여진 한국과 한국인의 특수성은 변함없고, 이를 보는 진중권의 시각과 비판또한 유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존재미학'이라는 장에서는 한국인의 성형 행태를 꼬집고 있는데, 2007년 이후로도 성형열풍은 더욱 심화되어 '한국=성형국가'라는 공식이 무색할 정도다. 거기에 진중권 나름의 미학에 기반한 통찰과 비판이 곁들여진다.
@ 존재미학
p.74 어느 병원의 간판에서 본 'aesthetic'이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미용(성형)'을 가리키는 그 낱말에는 '미학'이라는 뜻도 있다. 오늘날 한국인의 신체, 특히 여성의 신체는 점점 더 예술 작품을 지향한다. 그리고 대중은 일상적으로 여성의 신체에 대해 비평한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존재미학과 유미주의가 한국에서 부활한 듯하다.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예술의 재료가 신체일 때는 상당히 착잡해진다. 신체를 재료로 한 북한의 매스게임은 보는 이에게 근사한 작품일지 모르나, 정작 그 스펙터클 안에 들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코통이다. 남한의 신체 예술은 어떨까? 시선은 권력이다. 작품이 된 신체는 '보는 남자'에게는 미적 쾌감을 줄지 모르나, '전시된 신체'에게는 커다란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사진 출처 : 고뉴스
인상깊었던 주제중 하나는 바로 '미래주의'다. 진중권은 한국에서 IT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로 '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로 전락했던 역사적 경험'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런 경험이 한국인을 '미래주의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미래주의'는 20세기 초반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운동으로 전통에 대한 과격한 거부와 기술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모토였는데, 이 운동이 등장한 곳은 러시아와 이탈리아처럼 비교적 근대화에 뒤쳐졌던 나라들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IT기술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추종같은 '미래주의적 면모'는 비슷한 맥락에서 형성됐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IT문화와 함께 급속도로 확산된 영상문화와 구술문화가 문자문화를 구축하는 현상도 언급한다. 진중권은 '아직 문자문화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한 후진성이 외려 문자문화 이후를 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일부분은 나도 동감한다. 적확한 사례일지 모르겠으나 인터넷 공간에서의 한국인들의 서술은 대부분 구술체다. 수십, 수백개씩 달리는 뉴스 기사에 달리는 댓글을 보면 자신의 주장을 담기보다는 구어적 표현이 주를 이룬다. 사안에 따라 다를 순 있겠지만 영어권 뉴스 매체에 달린 리플들은 한국 뉴스 매체에 달린 리플과 달리 훨씬 정갈한 느낌을 준다. '이 사람들이 여기서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리플로 심오한 논쟁이 오가기도 한다. 진중권이 강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서양에 비해 독서나 글쓰기 교육이 허술하게 진행되는 문자문화의 미성숙이 어느 정도 인터넷 문화에 반영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문자문화의 미성숙이 영상문화의 원동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상문화와 소리문화의 발전은 매체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흐름이다. 따라잡을 수 없이 빠른 기술 발전과 수없이 많은 정보가 양산되고 있는 가운데 텍스트를 하나하나 읽으며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따른다. 이제 어디서든 빛보다 빠른 인터넷으로 세계 유수 대학의 강의를 들을 수 있고, 유명인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들을 수 있다. 비좁은 만원 지하철에서 책을 펴고, 출근 길에 사전을 펼치는 것보다 손안에 쥔 스마트폰으로 테드 강의를 듣고, e-book 어플이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게 더 효율적인 일이다. 물론 이렇게 배운 지식과 정보를 흡수하고 소화하는 것의 질적인 차이는 독서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독서가 여전히 인간의 가장 중요한 행위중 하나인 것은 변함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변화를 생각했다. 트위터 가입자 현격하게 줄어들고 인스타그램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상이다. 144자의 단문은 혁명과도 같이 등장했지만 최근의 트위터는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인다. 나는 이것을 영상(사진)문화가 문자문화를 이긴 것으로 본다. 현대인들에게는 144자도 너무 길다. 사진과 영상으로 한눈에 지인과 유명인의 현재와 일상, 기호를 파악할 수 있고, 긴 문장보다는 업로드 된 사진과 영상을 몇 개의 음절로 압축한 #해쉬태그가 더 경제적인 것이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가 인터넷/디지털 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디지털 구술문화' 챕터에서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구술문화가 강한 곳(한국)에서는 인터넷의 사용이 '친교적'이라면 문자문화에서 인터넷의 사용은 '정보적'이라는 해석이다. 8년 전의 상황이라 서양(특히 진중권이 있던 독일)에서의 인터넷 사용도 많은 변화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서양에서 인터넷이 '정보적' 성격을 띄는 것에 동의한다. 영어권 사이트들 중 특히 '무슨무슨 포럼' 같은 곳에서는 관심사별, 주제별로 상당히 깊이있는 정보 교류가 이루어진다. 대학시절 논문을 쓰며 동아시아 관련 포럼에서 상당히 주옥같은 정보들을 얻은 기억도 있고, 전자제품 관련 된 후기나 정보들도 상당히 유용하다. 덕중의 덕은 '양덕'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고 사실 이런 양덕들의 지식/정보 교환은 이런 다수의 포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서술이 많다. 뭐 더 할 말이 많지 글을 정리하는 시간이 길어져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아우라의 파괴' 챕터는 시간이 되는대로 예전에 썼던 글과 함께 버무려서 포스팅해야 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중권의 책과 글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똑같은 말 또하네"라는 생각이 든 책이기도 하지만, 진중권을 단순히 '트위터 전사', '논객'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기계화
p.30 보드리야는 오히려 맥루언의 명제를 거꾸로 뒤집는다. 그에 따르면 외려 '인간이 미디어의 확장'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이미 미디어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점점 더 미디어의 에이전트가 되고 있다. 한마디로 인간의 신체가 외려 미디어의 가능성을 실현시켜주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 근대의 신체의 변화 : 기계가 생산의 주역이 되면서 인간의 신체를 기계의 운동에 적응시키기 시작. 기계가 인간의 신체를 돕는게 아니라 인간의 신체가 기계의 동작을 도움. (p.31)
@ 회사인
p.40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인 신체만들기. 이는 한국 사회에 널리 퍼진 현상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제 몸을 기업의 요구에 맞게 뜯어 고친다. 언뜻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나, 이 '존재미학'은 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강요한 '생존미학'일 뿐이다.
@ 속도전
p. 66 빨리빨리 문화는 노동생산성이 노동력의 양적 투입에 의존하던 시절의 잔재다. 그것이 남아 있는 것은 정보화 사회로 진입한 이 시점에도 아직 산업의 상당 부분이 노동량의 단순 투입에 의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그 속도가 산업의 울타리를 넘어서 일상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몸을 뜯어고치는 국가와 시장의 생체공학이 그 동안 얼마나 철저하게 관철됐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 데카르트와 황우석
p. 110 같은 달력을 사용한다고 같은 시대에 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한국처럼 근대화가 압축적으로 진행된 사회에는 종종 전근대와 근대의 시간 축이 공시적으로 존재하게 마련이다. 이른바 '황빠'와 '황까'의 대결은 두 가지 시간의 대립이요, 두 가지 인성의 대립이다. 이것은 그 어떤 갈등보다도 더 근본적인 갈등이다. 한국 사회는 이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균열되어 있다. 두 개의 지각 판이 부딪혀 일으킨 황우석 지진은 깊은 곳에 존재하던 이 균열을 표면으로 드러내주었다.
@ 전 인민의 양반화
p. 118 조선 말기의 양반 계급은 정신적, 문화적 내용으로 귀족의 격조를 보여주지 못하고 그저 관혼상제 의식의 화려함이라는 껍데기로 신분을 과시하려 했다. 그리고 대중이 이를 그대로 따라 함으로써 아직까지 남아 있는 이른바 '체면 문화'가 발생한 것이다.
오늘 날에도 이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졸부 근성을 지닌 상류층은 정신적, 문화적 격조가 아니라 아무나 살 수 없는 값비싼 '명품' 등으로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려 하고, 대중은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똑같은 명품을 구입하여 그 차이를 지우려 한다. 대한민국의 명품 문화는 취향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그 성격이 조선 후기 체면 문화를 상업화한 것에 가깝다. 한국식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 위계를 위한 예법
p.122 수직적 예법의 과잉은 수평적 예법의 결여를 낳는다. (중략) 수직적 위계를 위한 예법이 매우 복잡하게 발달된 한국 사회. 수평적 교제를 위한 예법에는 이렇게 구멍이 나있다. 원래 전통 예법 자체가 신분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근대화마저 군대를 모델로 하여 이루어지다보니, 예법이 주로 수직적 위계를 세우는 데에 소용된 것이다. 그 결과 개인과 개인의 평등한 교제를 규제하는 품위 있고, 격조 있는 시민적 예법은 발달할 기회가 없었던 모양이다.
@ 공포와 습관
p.181 공포는 판단을 마비시킨다. 말도 못하는 아기들에게 원어민 선생 데려다가 영어를 가르치고, 이제 겨우 두세 살 먹은 아기들에게 철학 수업을 받게 하는 '광기'는 공포에서 나온다. 공포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든다. 유치원 다니는 아이에게 하루 종일 과외공부를 시키거나, 영어 발음을 좋게 한다고 아이의 부리를 잘라내는 '잔혹극'도 공포에서 나오는 것이다. 과거에 한국인의 심성을 지배한 것이 '전쟁'의 공포였다면, 오늘날 한국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시장'의 공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