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박해천 -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본문

사사로운 공간/읽다

박해천 -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영원한 화자 2016. 1. 3. 22:22





 그의 직업은 '디자인 연구자'다. 디자인이 철학과 미학, 사회학 등 다양한 것들의 복합물이라고는 하는데, 그의 저서들을 보면 그가 디자인 연구를 위해 얼마나 폭넓게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지 알 수 있다. 다른 필자들의 책과 달리 박해천의 저서들이 가진 재미 중 하나는 바로 참고문헌을 보는 재미다. 하나의 주제를 서술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디자인이나 미학 관련 글 뿐만 아니라 사회학, 문학, 정치학, 종교학 등 너무나도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활용한다. 너무나 다양해서 말이 안 나올 정도. 그가 주목받는 필자가 된 것은 잘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엄청난 독자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근데 내가 뭐라고 대학교수한테 엄청난 독자니 필자니 이러고 있지...)


신작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도 전작 <콘크리트 유토피아>, <아파트 게임>과 같은 '비평적 픽션'의 서술 방식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박해천은 다양한 분야의 단행본, 잡지, 연구서 등을 넘나든다. 이 정도면 '콘유 삼부작'은 참고문헌의 '향연'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요즘은 논문은 물론 잡지에 투고, 신문 기사까지 모두 데이터 베이스화 되기 때문에 관련 글을 찾기가 어렵지 않지만, 한 주제에 관련된 여러 분야의 참고문헌을 찾고 적게는 수십페이지 많게는 수백페이지를 읽었을 수고를 생각해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분명 그의 서재에는 형형색색의 포스트잇과 인덱스 스티커로 도배된 책과 논문들이 넘쳐날 것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와 <아파트 게임>이 제목이 보여주는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가 되는 반면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는 그와는 조금 달리 산발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이다. 아마 '아수라장'으로 표현한 한국이라는 국가와 사회가 성립되던 시기에 느닷없이 또는 제대로 된 물적, 정신적 기반없이 나타난 근대성을 보여주고 싶었던게 아닌가 한다. 6.25 당시 한반도에서 볼수 없었던 비행기와 탱크, 이층양옥, 자동차 등이 바로 그것이다. 


 전작부터해서 여전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은 주제를 보여주기 위해 해당 시기에 발표됐거나 해당 시기를 그린 문학작품을 발췌와 변형의 형식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 작품을 가지고 이런 식의 활용을 통해 사회현상 혹은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무심코 읽어넘긴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당시의 문학과 현재의 문학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당시의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측면이 많았는데, 그럼 지금의 문학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당시의 문학과 문학가들이 가졌던 무게와 현재의 그것들은 동등 혹은 비슷한가?)







박해천 교수가 공동기획한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에서 찍은 사진 몇장.

마지막 사진은 보면 볼수록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다. 



 아쉬운 점은 책 말미에서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 아수라장에서 박해천은 어쩌면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을 것으로 유추되는 '디자이너'를 등장시킨다. 앞의 내용이 어느 정도 내가 알고있거나 흥미를 가진 주제라면 마지막 장의 주제는 내가 전혀 지식도 관심도 없는 분야이기 때문에 흥미가 반감되는 점도 있겠지만 너무 전문적으로 서술하고 있어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상당부분은 자신의 책 <인터페이스 연대기>의 6장 '디자인의 모델링 인터페이스 : 투시도법과 CAD 프로그램'의 내용을 <아수라장의 모더니티>에 맞게 가공해 활용한 느낌이다. ( <인터페이스 연대기>는 2008년에 발간된 책으로 콘유 3부작 이전에 발간됐다. 제목 그대로 '인터페이스'의 역사에 관한 책인데 역시 흥미로운 책이다. '비평적 픽션' 이전의 박해천의 글을 읽을 수 있는 책.) 알지 못하는 내용이 마지막에 배치되다 보니 책이 영 시원치 않게 끝난 것 같아 찝찝했다. <아파트 게임>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도 몰입도가 떨어지는 내용이 나와 시원치 않게 독서를 마무리한 경험이 있었는데 그때가 떠올랐다.


좋아하는 필자의 흥미로운 내용을 담은 책이다. 전혀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다보면 뇌의 어두웠던 부분에 써치라이트를 비추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박해천의 책들이 그렇다. 거기에 그가 책을 써나가는 방식도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독서의 재미와 효용이 배가 된다. 대학에 다닐 때 교내 특강을 왔던 진중권 교수에게 글을 잘쓰는 방법, 당신이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해 질문을 한적이 있다. 자신은 책의 주제를 가지고 구글링을 해서 자료를 쭉 뽑은 다음에 그걸 가지고 변형과 가공을 하면서 살을 붙여 나간다는 답변을 하면서 '꼴라쥬'와 같은 방식이라는 말을 했다. 콘유 3부작은 잘 완성된 꼴라쥬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박해천 교수를 알게된 것도 진중권 교수의 트윗을 통해서다. 둘은 같은 대학에서 일한다. 둘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필자들이다. 책을 덮으며 이런 쓸데 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평점 9/10

서북계, 양옥집의 출현, 자동차의 도입, 아파트와 대형마트 등 내가 알지못했거나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다. 내가 요즘 공들여 쓰고 있는 글에도 많은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챕터의 아쉬움으로 -1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