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일본 버블 경제 정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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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버블 경제 정리.

영원한 화자 2013. 3. 28. 14:33

70~80년대 일본경제 호황기의 자료를 찾다가 버블경제까지 정리중.


1. 엔하위키의 자료. 위키 자료인만큼 적당히 필터링을 해서 봐야함.


일본경제.JPG

이 당시(1988년) 세계 50대 기업 순위. 무려 2/3(33개)가 일본인데 그 중에서도 상당수가 은행인것에 주목 할것. 20위까지 일본기업이 아닌 기업이 4개 기업 밖에 없다(...) 오호라 The worst Ever Polluting COmpany가 세계 6위 대기업이였구나. 그때가 좋았지......

Contents

1 개요
2 원인 및 배경
2.1 배경
2.2 주식거품
2.3 부동산거품
3 돈지랄
3.1 국내에서의 돈지랄
3.2 해외에서의 돈지랄
4 거품붕괴
5 각종 부정부패 사건
5.1 코스모스 리쿠르트 사건
5.2 허영중 사건
6 이후
7 관련 항목

1 개요 

Nippon BBC documentary 1980s Risen Sun

1980년대 일본의 비정상적인 자산가치 상승 현상을 통칭하는 말. 거품경제 붐에 의해 주식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가 실질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부풀어 올랐다. 잃어버린 10년을 넘어서 잃어버린 20년이 확정됐고.[2] 도호쿠 대지진 으로 인해 잃어버린 30년으로 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중...[3]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학계의 중론이 도출되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언론이나 일부 인구경제학 계에서는 이제 일본의 정체를 버블의 영향을 넘어 더욱 구조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바로 노동가능 인구비율이 최고 일때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가치가 폭등 했다가 노동가능 인구가 줄어들면서 급격하게 꺼지고, 덩달아 일하는 사람도 적어지니 저성장 크리까지 와서 나라 경제가 장기적으로 침체에 빠지는 현상으로 해석하는 것.

몇 년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나 일어난 특이한 현상으로 경제학자들이 유연하지 못한 일본관료들의 병크를 비웃었지만, 이제 비슷한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현상으로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구조상 일본을 똑같이 닮아가고 있는 한국에게도 많은 시사점헬게이트를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2 원인 및 배경 


2.1 배경 

1960~1970년대 고속 성장을 계속하던 일본은 미국을 경제성장으로 거의 따라잡고 있었다. 미국도 전후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율을 했지만 당시 일본의 경제성장은 무서운 속도였고 거기다 일본은 경제성장을 유지하기위해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며 무역흑자를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8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스태그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유지했고 세계자금이 달러로 모였고. 거기다 일본은 무역 흑자를 위해 엔을 저평가를 유지했다. 결국 당시 -미국달러환율은 250엔 = 1달러 수준으로 폭락해버렸다.

상황이 이 모양이 되버리니 미국 수출품은 터무니없이 비싸지고, 수출로 먹고사는 미국기업들은 뿌리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국의 중장비, 하이테크, 농업 관련 기업들이 들고 일어나서 독일이나 일본처럼 수입 물량의 제재를 의회에 요구하고, 실제로 의회에서 법안이 만들어지고 통과 직전까지 간다. 

의회가 맘대로 나서서 반 자유무역 법안을 통과 해서 무역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진 백악관은 플라자 합의로 적절한 압박과 회유로 일본등 동맹국들에게 달러를 저평가 하겠다는 깨알 같은 합의를 받아냈다.

하지만 플라자 합의로 일본의 수출은 큰 타격을 입고 이후의 일련의 일본 재정과 통화 정책들이 최악을 버블을 만드는 퍼펙트 스톰이 된다.

2.2 주식거품 

1980년대 초반 일본 기업들은 재테크를 벌이고 있었는데, 1984년에 일본 대장성은 "투금계정"이라는 불법계정을 합법화함으로써 일본 기업들이 주식이나 채권 등에 돈을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 기업들은 자본이득세를 한 푼도 안 내고 일본 증권사들의 투금계정에 돈을 넣어두고 재테크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해 엔-달러 환율이 149엔/1달러로 폭락(엔화 강세)하면서 일본 경제성장률이 -0.5%로 떨어지자, 기업들은 정부에 아우성쳤고, 이로 인해 정부에선 일본은행을 윽박질러 기준금리를 5.00%에서 2.50%까지 떨어뜨리게 된다. 이는 은행들의 대출폭풍을 가져와서 엄청난 양의 돈들이 각종 자산들에 쏟아지기 시작했다.[4] 이는 일본 기업들의 재테크 수익을 높여주었고, 다시 기업들의 주가가 오르면서 더 큰 재테크 수익을 갖다주는 순환구조가 형성되었다. 엄청난 악순환이었던 셈. 1985년 투금계정의 잔액은 9조엔이었으며, 1989년에는 40조 엔까지 팽창했다.

당시 일본 기업들의 영업이익은 사람들이 신경쓰지도 않았고, 재테크로 벌어들인 당기순이익이 커지는 것만 보고 달려들었다.

일본 증시가 이렇게 폭등하자, 일본 정부에서는 NTT에 대한 민영화작업을 시작했는데, 공모가와 공모주식 수를 발표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공모청약에 몰려들었으며, 상장 시초가가 120만엔이었다. 그럼에도 단 이틀만에 25%가 추가상승했고, 2주만에 정확히 두배인 240만엔까지 치솟았으며, 1989년 연말에는 400만엔 부근까지 치솟았다. 이쯤 되면 정말 개똥 막장이다

당시엔 수백만엔대를 호가하는 NTT보다 주가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주식이 폭등하기도 했었고, 언젠가는 뜰 것이라는 예상에 주가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막장 증시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2.3 부동산거품 

성층권을 넘어 중간권을 돌파해 우주 한복판을 날고 있었던 주식거품은 부동산버블로 합리화되었다. 일본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토지가격이 50배 정도 뛰어오르는 동안 소비자물가지수가 단 두배 오르는 기현상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일본 국민들에게 토지불패신화를 불어넣는 역할을 했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떨어지지는 않는다. 당시 일본 부동산버블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어딘가에서 들은 말 같다면 기분 탓이다. 여러분! 지금 집 사면 패가망신 합니다!

기준금리가 2.5%까지 떨어진 상황에서 은행들은 대출경쟁을 벌였다. A은행에서 8% 금리를 제시하면 옆 B은행에 가서 7.5% 대출을 제안받고, 다시 그 옆 C은행에서 7% 대출을 받아가며 토지 투기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가격의 200%까지 담보가 인정되었으며, 지속적으로 지가는 올라가기만 했다. 부동산 버블이라고 뉴스가 연일 나오는 현재 한국의 수도권 LTV는 전세 포함하면 더 높기는 하지만... 50% 수준인 걸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어이 없는 담보율인지 계산이 나온다.

처음에 도쿄 중심가(미나토 구)에서부터 시작했던 부동산 광풍은 도쿄 전역을 넘어서 오사카나고야교토 등 일본 주요도시들로 확산되었다.[5] 1988년에 도쿄 지가는 1987년대비 3배가 폭등하기도 하는 등 이쪽도 엄청난 거품이 끼어 있었다. 역시 주식거품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니 더 많은 대출이 가능해져 계속 올라가는 악순환이었다. 당시엔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고[6]

3.1 국내에서의 돈지랄 

돈지랄이 풍년인 시대 였다. 외제차 수입이 급증해 벤츠 주력모델이던 W201은 너무 많이 보급돼 고(故)벤츠로 불리웠으며 BMW 3시리즈는 롯본기 코롤라[7]란 별명이 붙었다. 우리로 치면 압구정 아반떼 정도의 뉘앙스. 호기로술집 단골 아가씨에게 그 자리에서 가게 하나를 내준다든가 등등.

프리터도 이때 최고로 유행하고 있었다. 언제든 취업할 수 있는데 안 하는, 새로운 낭만적인 라이프스타일 쯤으로 취급받았다고.

주가와 부동산이 연일 뛰어오르자 국민들도 풍족하여 만화와 애니메이션영화는 별 거지같은 내용을 만들어도 잘 팔렸다. 그래서 80년대 애니메이션 중엔 이상하게 작화 퀄리티는 90년대 것보다 쓸데없이 돈지랄스럽게 좋은데 내용은 난해하거나 거지같은 게 좀 많다. 물론 이 와중에도 걸작은 정말 걸작다운 물건이 나왔는데, 대표적으로 은하영웅전설 애니메이션판은 전곡 OST를 오케스트라로 때려박는 흠좀무한 물건을 만들어냈다(...). 어? 작화붕괴 쩔었는데?

코미케의 오오테 여고생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기도 했다고.

거품경제 시절에 대한 2ch의 회상#

3.2 해외에서의 돈지랄 

일본의 부동산 광풍은 해외로 뻗어나가 미국의 록펠러 센터(미쓰비시가 매입),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일본인과 다른 미국인 투자자가 서로 파트너쉽을 체결해 매입)이나 콜롬비아 영화사(소니가 매입) 등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되자 되려 미국에서 이거 우리 수출 살리려다 역관광당하는거 아니야?라는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8] 다행히 역관광은 끝이 났지만.

주가와 부동산이 뛰어오르면서 이를 담보로 한 대출이 급속도로 많아지면서 시중에 풀리는 돈이 급증하자, 넘쳐나는 돈을 써보기 위해 일본인들은 세계 명화(名畵)들을 싹쓸이하기 시작했다.

고흐의 해바라기를 3629만 달러에 낙찰해가는 등, 피카소나 르누아르를 비롯하여 크리스티 경매장에 나오는 거의 모든 미술품들을 일본인들이 싹쓸이해갔다.

예술품은 경매가가 정해지면 그 경매가가 다음 경매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계속 거래가가 치솟을 수 있으며[9]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4 거품붕괴 

그러나 1990년대 새해 첫날부터 주식에서 거품경제 붕괴의 전형적인 케이스를 탄다. 연말에는 연초 최고치의 절반수준으로 급감, 그리고 90년대 후반에 IT버블로 잠깐동안 주가가 상승하나 싶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 IT거품이 꺼지면서 그 절반으로 급하락. 국민들은 졸지에 알거지가 되고 물가 역시 계속해서 하락세를 거듭하고 있다. 정상적인 경제에서는 이러한 디플레이션이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 시기 일본에 대해서는 '버블로 고! 타임머신은 드럼 방식'이라는 바바 야스오 감독의 2007년 영화로 엿볼 수 있다.

5 각종 부정부패 사건 

5.1 코스모스 리쿠르트 사건 


5.2 허영중 사건 

허영중 참조.

6 이후 

현재 거품경제 침체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올랑 말랑 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1990년부터 2000년까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며 굉장히 아쉬워하고 있다. 이 시기를 통해 한국 경제는 일본 경제와의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1990년 기준으로 1인당 GDP가 일본이 3만 달러가 넘던 시절 한국은 5000 달러 중반대 수준 이었다. 2011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약 2만달러로 추산되는데 일본은 여전히 3만달러 후반 ~ 4만달러 초반으로 물가를 고려해보면 사실상 제자리 걸음이다. 거기에 PPP로 평가하면 양국 소득격차는 더 줄어든다! (사실 거의 비슷하다)

취업시장 역시 버블 붕괴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안그래도 미니 베이비붐 세대가 취업을 준비할 때라 더 많은 일자리를 필요로 했는데 일자리가 왕창 줄었으니 스펙이 아무리 좋아봤자 취업문은 바늘구멍이었다[10]. 이 시기가 취업빙하기라 불렸으니 더 이상 설명이 必要韓紙?

다만 일본의 대졸자 취업구조는 우리와 많이 달라서, 취업난의 개념도 좀 다르다. 일본은 대학4학년이 되면 리크루팅이 시작되어, 졸업 전에 입사가 확정되는 시스템. 군대를 안 가니까 4년 바짝 하고 졸업하는 구조 그리고 일단 입사하면 이직이나 경력자 전직 등의 형태로 회사를 옮기는 것이 쉽지않다. 간단히 말해 졸업식 전까지 결정된 회사가 이후 인생행로를 결정한다. 마찬가지로 졸업식까지 취직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이런 경우 정상적인 취업은 사실상 불가능.

한국처럼 졸업하고도 계속 도서관 다니며 취업준비하는 경우는 없다, 기보다 불가능하다. 아주작은 중소기업도 졸업 =신입사원이라는 공식이 박혀있다.[11] 따라서 졸업예정인 4학년들이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단 몇개월에 불과한 리쿠르트 시즌에 전인생이 걸린거나 마찬가지. 여기서 밀리거나 탈락하면 패자부활의 기회따위는 없다. [12]

그러다보니 누구나 채용오퍼를 서너개씩 받아서 느긋하게 골라가며 졸업준비하던 거품경제 시기와 비교해서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 객관적인 수치로는 일본의 고용시장은 다른 OECD국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안정적이다. 특히 청년실업율은 일부. 유럽국가들의 상황에 비추어보면 환상적으로 낮은 수준.

실제로 2011년 기준 일본의 대학 졸업예정자의 취업확정율은 90%를 넘고, 잃어버린 20년 기간 중에도 90% 선이 깨진 것은 미국 금융위기가 폭발한 직후인 2009년 정도였다. 

일본으로 넘어갈 듯 하던 세계경제의 패권이 다시 미국에 돌아오게 되자, 미국에서도 엄청난 거품경제가 발생했는데, 빌 클린턴시대의 IT버블이 그것. 하지만 일본 거품경제 처럼 장기화 되지는 않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출동하면 어떨까?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대표적인 Bubble Economy로 불린다. 이 글에서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 어떻게 발단이 되어 진행되었는지, 그 결과로 어떠한 경제, 사회적 파장이 있었는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일본의호황과미국의견제

일본 Bubble의 시작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에 걸친 Oil Shock로 인해 1 배럴 당 50 센트에 불과했던 원유가 40 달러까지 치솟았다. 석유 가격의 상승은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물가 상승 속 경기 침체인 Stagflation[1]이 발생했다.

이 때 나온 것이 Reaganomics이다. 물가를 내리기 위해 Reagan 정부는 17%에 이르는 금리 인상을 단행했고, 이를 통해 미국 정부는 1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금리로 인해 미국 기업들은 설비 투자가 어려워 결국 미국의 제조업은 붕괴되었고, 실업률은 10.8%에 이르게 되었다.

이 틈을 타 일본 제품이 미국 시장을 휩쓸게 되었다. 연 평균 수출은 18.2% 증가했고, 미국 전체 수입의 20%를 훌쩍 넘기게 되었다. 수출 호조 덕분에 일본은 2차 Oil shock의 불황을 타계하고 호황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대미 수출의 선전으로 일본 수출 기업들은 엄청난 잉여 자금을 유보하게 되었다. 은행들은 자금을 유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 국제 금융계는 일본 은행들에게 국제 규범에 맞도록 BIS를 8% 이상으로 맞출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장성은 시중 은행들의 자기 자본 확대를 위해 투신사는 물론 기업들에게도 투금 계정[2]을 허용하는 조치를 내렸다. 기업들은 투금 계정을 이용해 부동산 구매에 열을 올렸다. 당시 일본 은행들은 기업 대출 시에 부동산 담보 대출을 관행으로 여겼는데, 이것이 기업들의 부동산 구매를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기업들의 부동산 구매로 부동산 가격은 상승하게 되었고, 상승된 가격을 담보로 은행은 더 많은 돈을 기업에 대출했다. 다시 기업은 대출금으로 부동산을 구매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고, 이것이 일본 Bubble의 실질적인 시작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 일본은 무역 흑자가 급증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과 무역 마찰을 겪게 되었다. 이에 미국, 영국 등은 만성적인 대일 적자를 해소하고 일본의 수출을 줄이기 위해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 (Plaza Accord)[3]를 통해 “엔高, 氐달러” 정책을 결정하였다.

이로 인해 1달러에 250엔이던 환율이 120엔 수준까지 낮아지게 되었고, 엔화 강세에 따라 수출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1986년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0.5%를 기록하는 등 수출 주도형의 일본 경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일본의대응과부동산버블의형성

수출 부진으로 인한 불황을 염려한 일본 정부는 긴급히 저금리에 의한 경기 부양과 내수 확대 정책을 실시하였다. 당시 5% 대였던 공정 금리[4]를 1986년 1월부터 1987년 2월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2.5%까지 인하했다. 저금리 정책은 3년 이상 지속되었다.

금리 인하와 함께 경기 부양을 위해 시중에 푼 돈으로 인해 통화 증가율이 1985년 3.8%에서 1988년에는 13%로 확대되어 부동 자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더불어 연간 1~2%에 머물던 부동산 대출 증가율이 10배 가까이 증가했다. 저금리 기조로 인해 대출 금리도 낮아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택 가격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이는 주택 수요를 급증시켜 집값을 상승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한 내수 경기 부양을 위해 국토개발계획을 발표했으며, 토지 가격을 급등시켰다. 토지 가격이 급등하자 기업들은 토지를 담보로 거액을 융자 받아 또 다시 땅을 사는 악순환을 지속했다. 엔화 강세를 기반으로 미국의 부동산을 사들이기도 했다.

일본의 주택 보급률은 이미 1968년에 100퍼센트를 넘어섰다. 그러나 투기는 계속되었고, 1987년 8월 강화한 지가감시구역제도와, 1987년 10월 법인이 토지를 취득해 2년 이내에 양도할 경우 시세 차익의 96퍼센트를 환수하는 중과세 제도도 실효가 없었다. 1988년 한 해에만 동경의 공시지가는 65.3% 폭등했다.

“토지 불패의 신화”에 힘입어 부동 자금은 끊임 없이 부동산으로 유입되었다.[5] 부동산 담보 대출은 계속 증가해, 22조 엔이었던 부동산 담보 대출은 1989년에 80조 엔으로 치솟았다. 시중 은행들의 대출도 심화되어 부동산을 담보로 평가액의 120%까지 대출을 해 줄 정도였다. 과도한 부동산 투자는 엄청난 집값 상승을 불러왔고, 1980년대 말에는 일본 국토를 팔면 미국 국토를 3~4번은 살 수 있을 정도로 부동산 가격이 급증했다. 이 때 일부 학자들이 버블을 주장했지만, 부동산 불패를 외치는 학자들과 도서들에 밀려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환율 쇼크로 일본 제조업체들은 해외 이전을 본격화했다.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 임금이 낮은 국가들로 해외 이전을 했으며, 그 이유는 임금보다는 환 Hedge였다. 대기업들은 수출용 제품은 해외 공장에서, 내수용 제품은 일본 내에서 생산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제조업의 해외 이전으로 인해 부동산 가격의 구조적 하락이 발생하게 되었다. 지방 경제의 원동력이 되었던 제조 업체들이 해외로 이전하면서 지역의 경제는 침체되었고, 땅값도 동반 하락하게 되었다.

 

Bubble 붕괴

일본 정부의 저금리 정책은 시중의 돈을 부동산으로 몰리게 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 동안 일본 정부는 투기 억제에만 힘을 쏟았을 뿐, 금융 정책에는 손도 쓰지 않았다. 버블의 원인이 저금리 정책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닫고 금융 정책에 손을 쓰기 시작했다. 1989년 5월부터 1990년 8월까지 일본 정부는 금리를 2.5%에서 6%까지 급격히 인상했다.

Bubble 붕괴의단초는금리의급격한상승이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1989년부터의 금리 인상은 일본 Bubble의 붕괴를 가져왔다.

1990년 4월에는 부동산 대출을 규제하는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정책으로 은행들은 대출을 거부하고 대출 자금 상환을 요구했고, 시중 자금이 바닥나면서 주가는 하락을 면치 못했다. 또한 투기성 매물이 쏟아져 나왔고 지가도 하락하기 시작했다. 1991년부터 도산하는 부동산 업체와 건설 업체가 속출하면서 장기 불황은 시작되었다.

1960년에서 1990년 사이 종합 주가 지수는 50배 이상이 올랐다. 엄청난 부동산 상승으로 사람들의 지출은 도를 넘게 되었다. 실물 경기는 좋지 않지만 주가는 급등하고 지출은 느는 전형적인 유동성 장세가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부터 1989년까지 계속된다. 이 기간 동안 Nikkei 지수는 13,000에서 38,000 포인트로 상승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Nikkei 지수가 6개월 사이에 39,000 포인트에서 25,000 포인트로 급락하게 되었다.

1960년에서 1990년 사이 도쿄의 부동산은 200배가 상승했다. 그러다 이후 15년 동안 87.2%가 폭락했다. 1990년부터 199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534조 엔에 이르는 토지 자산액이 감소했다. 이 중 가계가 140조엔, 법인이 180조 엔의 자산을 날린 것이다. 지가의 하락은 도쿄를 중심으로 한 대도시에서 시작되어 지방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1992년부터 최근까지 한 번도 상승 없이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Bubble 붕괴이후의정책

고금리는 초저금리로 반전되었다. 최고 6퍼센트까지 상승했던 금리는 91년 7월 이후 인하로 돌아서고 금융 완화책은 지속되었다. 1991년 7월에 5.5%로, 11월과 12월 인하를 통해 4.5%로 금리를 인하했다.

디플레이션이 가시화되자 2001년 이후 일본 은행들은 양적 완화 정책을 시작했다. 소비자 물가지수 상승률이 안정적인 수준에 이를 때까지 장기 국채 매입을 확대하는 것이다. 현금과 예금 비율이 급격히 상승하며 대출이 위축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에 통화량 증가를 도모한 것이다.

이 같은 저금리 정책은 부작용도 보이고 있다. 가계 이자소득 감소와 개인 소비 침체, 기업 구조조정의 지연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대장성은 주가 하락을 막기 위해 주식 시장 개입을 통한 부양책을 썼다. 1990년 2월에는 마진론 대출폭을 확대해 담보 주식 대출 비율을 30%에서 50%로 확대했다. 4대 증권사에 유상증자, BW 발행을 금지했지만 주가는 3만 포인트로 하락했다. 주가가 2만 포인트 선까지 하락하자 증권사에 주식 매입 명령을 내리고 보험회사들의 주식 매도 금지 명령을 내렸다. 또한 연기금 및 우체국 예금까지 이용해 주식 매수를 했다. 이러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1992년 8월 Nikkei 지수는 14,309 포인트까지 하락했다.

대장성의 금리 인하와 주식 시장 개입으로 인해 금융 기관들의 유동성은 크게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주식과 부동산 가치가 하락했고, 매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금융 기관들은 부실 채권의 폭탄을 맞게 되면서 은행들이 부실로 도산했다. 시중 은행들에 12조 엔의 공적 자금이 투입되지만, 연쇄 도산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다.

앞선 2년 간의 증시 부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일본 정부는 1992년 8월부터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사용했다. 그 규모는 다음과 같다.

 

-          1992년 8월: 10.7조 엔 투입, 3.25%로 금리 인하

-          1993년 4월: 13.2조 엔, 2.5%로 금리 인하

-          1993년 9월: 8조 엔, 1.75%로 금리 인하

-          1994년 2월: 15.3조 엔

 

경기 부양책도 실패로 끝나자 일본 정부는 제로 금리 정책을 선택했다. 1995년 9월 금리는 사상 최저인 0.5%로 인하되었다.

엔고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일본 수출 업체를 구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170회가 넘게 외환 시장에 개입했다. 그러나 엔고를 저지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일본의 장기 침체가 세계 경제에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의 도움으로 엔고 문제는 일단락되게 되었다.

위와 같은 대책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제는 여전히 수렁을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110 ~ 120엔 선을 유지하던 환율이 1998년 6월에 140엔을 돌파하자 일본 경제는 위기감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는 제로에 가까운 금리와 경기 부양으로 시중에 엄청나게 풀린 자금, 거기에 엔화 하락으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의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국의 개입으로 150엔을 마지노선으로 환율은 방어되었고, 9월에는 130엔 대로 환율이 안정되면서 일본은 외환 위기를 가까스로 비켜 가게 되었다.

계속되는 금융 기관들의 파산으로 일본 경제는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전 수상이었던 미야자와가 대장상으로 1998년 취임해 다시 한 번 경기 부양책을 사용했다. 그 해 4월에 17조에 달하는 경기 부양책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단기적 부양에 그치고 주가와 부동산 가격은 계속 하락했다.

1998년 11월에 17조엔, 199년 11월에 11조엔, 그리고 2000년 10월에 11조엔의 경기 부양책이 시행되었으나 결국 일본 경제의 회생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의 재정 적자는 GDP 대비 140% 수준까지 증가했다.

앞선 경기 부양책들이 실패한 이유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정책의 시행이었기 때문이다. 즉, 은행의 부실을 털어 내고 부실 채권을 정부가 매입해 금융을 정상화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임에도, “건설 – 은행 – 정치가와 관료”의 커넥션을 깨지 못해 부실을 청소할 수 없었다. 미야자와 대장상은 금융 부실 제거 프로그램을 시도했지만, 관료들의 엄청난 반대로 결국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고이즈미 총리가 대장성을 해체함으로써 그 커넥션을 단절시키고 금융 개혁을 실시할 수 있었다. 그 첫 시도로 2002년 10월 금융 재생 프로그램을 통해 대손 충당금의 기준을 강화하게 되었다. 느슨한 규제로 그 동안 시중 은행들은 부실 채권 규모를 은폐했는데, 기준 강화와 함께 공적 자금을 투입함으로써 부실 채권을 상각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003년 4월에는 산업재생기구 설립을 통해 금융권의 부실 채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또한 부실한 금융 기관은 우량한 금융 기관에 합병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 같은 조치들을 통해 결국 일본은 장기 불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Current Status

일본은고령사회로접어든오래다. 100이상노인의수가 4명에육박하며, 60이상노인이전체국민의 21%이르고있다. (2030년경에는 33%까지증가할것으로예측되고있다.) 일본경제의특성은국가자산의 4분의 3 60이상의노인들이소유하고있다는점이다.

승수효과는자본을얼마나효과적으로굴리는가를보여주는척도이다일본의자산은승수효과가상대적으로매우낮은것으로보인다자세히말하면노인들이굴리는자산의승수효과가낮다고있다돈이경제전체적으로순환되지못하고곳에몰려있다는의미이다.

문제는여기에서시작된다경제의원활한흐름에자금의흐름은필수적인데자본이동맥경화와같은상태에이른것이다국가의입장에서는승수효과가낮아稅收가낮아진다자금을집행할만한여력이부족하고그럼에도불구하고유권자의 30%차지하는노인층으로부터지지를얻기위해복지예산은없이증가하고있다유권자노인층의비율이높으므로나은복지혜택을정책으로내세우지않으면당선이어려운실정이다.

결국재정적자를메우기위해발행하는국채를사들이는것도노인층이다악순환인것이다.

일본은 1인당저축량이단연세계최고인부국이다그러나일본정부의재정은상태가매우불량하다일본정부는미국정부보다 GDP 대비 2.5배의빚이있다.

Ghost town, 노동시장 (니트족은 일할 의지 없다. 프리터족은 알바로 연명한다. 실업률은 2010년 5퍼센트를 넘었다. Working Poor는 2007년에 이미 천 만 명을 넘었고, 비정규직은 40%를 상회했다.)

Lessons Learned

우리나라는여러경로로노인층의자산이젊은층으로흘러들어간다그러나일본은버블붕괴의충격기러기아빠등의사회적문제[6]인해노인층의자산이경제의다른부분으로좀처럼옮겨가지않는다주식투자와부동산투자는고려도하지않고오직현금보유만을생각한다노인층은자신들의자산을움켜쥐고있는셈이다.

투기로인해입은상처로좀처럼노인층의투자나소비가활성화되지않는것이다투기를예방한다는측면에서는바람직한현상이나경제의활성화경제의순환이이루어지지않는다는점에서는매우골치아픈문제이다.

앞으로의일본부동산전망이밝다고낙관할없는이유하나도고령화이다인구감소가본격화됨에따라주택수요감소는필연적을발생할것이다. (이와더불어농지축소로인한가용토지의증가공장의해외이전으로인한주택용토지의증가가일본부동산하락을전망하는원인들이다.)

소득은 크게 근로 소득과 자본 소득으로 구성된다. 우리가투기라고부르는현상은자본소득의증가 – 실물자산의가치상승으로인해장부상의가치가증가하는것이지당장가용한자본이증가하는것이아니다 – 동인이되어근로소득을넘어서는소비를하는현상을포함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고 하자. 이 기분에 취해 실제로 돈을 과하게 쓴다면 이는 자산에 대해 투기적 심리가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지식이나 기술을 획득해 근로 소득을 늘리려는 노력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문제 중 하나는 이 같은 투기였다. 근로 소득의 양과는 상관 없이 지가와 주식의 상승을 믿고 일본 국민들은 과한 소비를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와의 계’였다. 실제로 해외에서 일본 내로 들어오는 자본은 없는데 일본 국민들은 해외에서 엄청난 돈을 소비했다.

일본의실질경제는하락하고있었으나풀린돈으로인해시중경기는좋아지는현상이바로일본의버블이었다. 실질 경기의 회복 없이 시중에 자금이 넘쳐났고, 그 자금이 부동산으로 흐르게 된 것이었다. 이 시기에 필요했던 것은 고통을 국민이 감내하면서 구조 조정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본은 Bubble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Bubble을 만끽하였다.

또한 Bubble이 터진 후에 투기를 자제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증권회사들은 ‘장기 투자 필승, 위기 즉 기회’라는 구호를, 부동산 회사들은 ‘일본 열도 황금성 이론’이라는 구호를 들고 투기를 부추겼다. 일본 국민들은 마지막 남은 돈까지 투기에 쏟아 부었다. 애도 시대부터 계속 되어 온 ‘부동산 불패’는 Bubble이 꺼진 후에서야 깨지게 되었다.

일본의 불황은 저금리와 경기부양책으로 대표되는 케인즈식 정책으로는 쉽게 불황을 탈출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불황 탈출을 위해서는 케인즈식 정책에 적절히 통화주의를 더하고, 특히 건전한 금융 시스템을 정착시킬 때 가능한 것이다.

 

References

  • “The Next Global Stage: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in Our Borderless World”, Ohmae Kenichi (大前硏一), Wharton School Publishing, 2005
  • 욕망과 혼돈의 기록 도쿄 1991, KBS 스페셜, February 4th, 2007
  • “<목요특강> 경제평론가 박경철의 2009년 6월, 우리 경제 안녕하십니까?”, KBS 아침마당,  June 25th, 2009
  • KBS: 최진기의 생존 경제, 3회 버블은 어떻게 붕괴되는가

 


[1] 물가 상승을 의미하는 Inflation과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Stagnation의 합성어이다.

[2] 투신사들이 은행에 자금을 예치하고 투신 업무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계정이다.

[3] 미국, 영국, 서독, 일본, 프랑스의 선진 5개국, 즉 G5의 재무장관들은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회담을 열었다.

[4] 중앙 은행에서 일반 은행에 대출해 주는 이자율이다.

[5]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엔氐 덕분에 수출이 증대되고 수입이 감소했다. 이 덕분에 패전과 가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높은 저축률과 투자는 계속되었으나, 일반 국민의 희생이 따랐다.  국내 구매력은 감소했고, 노동력은 값싸게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수출 기업과 달리 국내 기업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어 경쟁력이 떨어졌다. 내수와 수출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로 인해 경쟁력 낮은 국내 기업에 대한 투자 대신, 주식과 부동산에 자금이 몰리게 되었다.

[6] 일본 경제가 호황인 80년대에 부모들은 자녀들을 해외로 유학 보냈고, 90년데 경제 불황의 여파로 이들은 국내로 복귀하게 되었다. 부모들은 남은 돈으로 이들의 사업과 주택을 지원했으나, 자녀들이 부모를 버리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잃어버린 10년

목차

 [-]
1 본문
1.1 불패 신화와 버블 경제
1.2 필연적인 버블 붕괴 - 잃어버린 10년
1.3 잃어버린 20년
1.4 잃어버린 30년?
2 일본 외의 국가들의 경우
2.1 "잃어버린 10년"의 재발견
3 비교 참조 항목
4 관련 항목


失われた10年, 平成不況(헤이세이 불황)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의 소멸 이후 1991년서부터 2000년대 초까지 이어진 일본의 경제 불황을 일컫는 말. 유식하게 말하면 일본 경제의 3대 과잉 요소(설비, 고용, 부채)의 해소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여파는 현재2012년까지 이어지고 있다.


1 본문 

 

1.1 불패 신화와 버블 경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듭했다. 원래는 효율적인 경제 전략 및 투자와 일본인의 근면성과 높은 저축률 등에 의한 것이었으나, 성장이 계속되면서 점점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는 것이 이익을 더 많이 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에 따라 거품도 점점 커지게 되었다. 거품이 터지기 직전에는 '일본을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나오고 한 술 더 떠서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도 나왔으며, 도쿄 긴자에서 제일 비싼 땅 값이 평방미터당 10억원에 육박할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때 일어난 일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 예를 들어보면

  • 기업에 면접을 보러갈때 기업에서 거마비[1]를 준다. 그것도 1인당 2~3만엔씩 쥐어줬다고 한다(…)[2]. 이건 뭐 여기저기 면접만 보러 다녀도 금방 부자될 기세. 실제로 이런 식으로 취직은 안하고 면접만 백군데 정도 봐서 차를 한대 뽑은 바보도 있다고 한다.
  • 흑자가 나는데도 일할 사람이 모집이 안되는 바람에 도산. 3D직종이라서가 아니라 알바만 근근히 해도 먹고 살 수 있어서(…).[3]
  • 입사 시험에서 일부러 다 틀리게 냈는데 취직. 오히려 회사에서 대학들을 돌아다니며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내세워서 취직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 20대 연봉 천만.
  • 정기예금 금리가 8%.
  • 프리터가 낭만적으로 보임.[4]

그러나 이 흥청망청은 오래가지 못했다.

 

1.2 필연적인 버블 붕괴 - 잃어버린 10년 

결국 1989년 말 주가가 고점을 찍은 것을 신호로,[5] 1990년 새해가 시작하자마자 대장성(現 재무성. 한국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해당)에서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출자총액제한 제도라는 강수를 둠으로서 주가와 부동산이 폭락하기 시작하면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후 10년간 주가 지수(닛케이 지수)는 반토막나고 부동산은 평균 1/3에서 최대 1/10까지 떨어졌다. 이 과정에서 담보를 팔아도 대출금을 갚을 돈이 모자라 갚지 못하는 경우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다량의 부실 채권(상환 불가)이 발생하였고 이를 견디지 못해 은행이 도산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당시 대출의 약 1/10이 빵꾸났으니 그 타격은 알만할 것이다.

게다가 90년대 말 IT버블로 인해 주가가 잠시 회복되는 듯 보였으나[6] 이것도 얼마 못 가 꺼지면서 주가가 거기서 다시 반토막이 났다. 참고로 현재 주가 지수는 최고점의 거의 1/6 수준.[7] 

1.3 잃어버린 20년 

결과적으로 일본의 성장률은 그때 이후로 거의 0~2% 수준으로, 실질 성장률은 사실상 마이너스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2010년까지 이런 현상이 계속되어 10년이 아니라 20년이 되었다.현재 2011년 아직도 저성장 혹은 마이너스 성장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에서 디플레이션보다는 인플레이션이 일반적인 추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유일무이하게 (낮은 수준이지만) 디플레이션 불황이 20년 가까이[8] 지속되는 매우 특수한 사례. 그만큼 경제에 활력이 없다는 의미이며, 또 80년대의 거품경제가 심했다고 할 수 있다. 흠좀무. 때문에 가끔씩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한마디로 80년대의 일본의 경제수준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소리.

게다가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말 그대로 돈을 쏟아부은 탓에 일본의 국가부채는 2011년 3월말 973조엔(=한화 1경 7000조원), GDP 대비로는 220%로 예상되어 선진국 중에서는 가장 높고, 전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서도 짐바브웨 다음으로 2위이다.[9] 상당한 불안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덕분에라도 경기가 잠시나마 약간 살아나는 것처럼 보였으나, 2008년 중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로 인한 전 세계적인 불황이 찾아왔다... 야 신난다! 일본은 디플레이션을 선언한 상태. 

1.4 잃어버린 30년? 

게다가 2011년에는 사상 초유의 천재지변까지 겪으면서 가뜩이나 모자란 재정, 지출될 일만 더 많아졌다. 자칫하면 잃어버린 20년을 넘어 잃어버린 30년까지 충분히 갈 수 있는 상황. 듀크 뉴켐 포에버는 가뿐히 넘겼다! 그.. 그런데 그놈의 사상 초유의 천재지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11년도 3/4분기 최초로 건설경기 붐이 일어 일본이 오랜만에 성장세를 보였다! 역시 건설신은 만병의 묘약 하지만 1980년 이후 31년만에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으며, 이미 중국에게 추월당한 GDP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1989년 즉위한 아키히토 덴노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하였기 때문에, 아키히토의 연호인 헤이세이를 따서 '헤이세이 불황'이라고도 한다. 안습.

2012년 12월 16일 치른 중의원 선거에서 의회 제1당이 된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재가 공공지출을 높이는 것 뿐만 아니라 무제한 양적완화를 공언하며 "일본 중앙은행과 협의를 통해 물가상승률 목표 수치를 3% 상승 시키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즉 물가가 3% 오를 때까지 화폐를 찍어내겠다고… 이 공약이 정말 실행될 경우 내려가고 있는 엔화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굿즈! 굿즈를 사자! 하지만 중앙은행은 선거 전 양적완화를 탐탁치 않아 했으며 보다 장기적인 대책과 구조적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다.

2 일본 외의 국가들의 경우 

여담이지만 이 잃어버린 10년 덕분에 1990년대 미국은 한시름 놨다고 전해진다. 일본이 금방이라도 따라잡을 것이라 우려하면서 일본 경제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던 것도 이 시기 전까지인 1980년대의 일.[10] "역시 일본이 날고 뛰어봐야 우리를 뛰어넘을 순 없지 ㅋㅋㅋ" 천조국이 괜히 천조국이 아니지

아니 사실 이 현상의 시발점이 1985년 9월 22일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합의였다. 이 협의로 엔화의 가치가 올라서 엔화의 이점이 없어졌다. 이후 일본의 경제 가치가 급등하여 한동안은 일본의 버블경제가 최고조로 달했고, 그래서 되려 미국이 일본 엔화에 먹혀서 제꾀에 제가 넘어가는 형국이 되는건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본격 국가단위 고육지계 결국 터졌다. 반면 이 시기 한국은 이 시기 국가 채무가 위험수준까지 이르렀지만 엔고를 기점으로 수출이 급증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고, 결국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이른바 '3저호황'을 탔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으로 한숨 돌린 미국은 현재 중국의 초고속 성장으로 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듯. 아니 당장은 자기네 걱정부터 해야 할 듯하지만...[11]

그리고 기억해야 할 점은, 한국도 절대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일본화(Japanization)는 이제 불황에 대처하는 선진국들의 필수적인 코스로서 미리 연구해야하는 사례가 되었다. 

2.1 "잃어버린 10년"의 재발견 


그러다보니 역으로 세계금융위기 이후 이제보니 일본은 그나마 이런 장기 침체에서 연착륙에 성공한거 아니냐라는 한숨이 나오는게 선진국들의 현실이다. 최소한 일본은 실업자 양산을 막으면서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로 여겨졌던 평생 직장은 되려 이런 시기에 일본의 중산층들을 20년 동안이라도 버티게 해줬던 놀라운 비결로까지 여겨지고 있다. 쉽게말하면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원리 말이 좋아 20년이지, 20년간 폭삭 망하지 않고 타이타닉 같더라도 제2의 경제대국(2011년 부로 제3의 경제대국)을 유지했다면 최소 한 세대는 버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최소한 IMF는 맞지 않았으니까.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은 안 좋아할 수도 있다 지난 5년 가까이 고용 체계가 박살난 서구 국가들에 비하면 양반이란 이야기. 애초부터 몇몇 석학들이 말해오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령화라는 최종보스가 아직 버티고 있기 때문에 영영 못빠져나오면 결국 망한다는 점에서 변명이 못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폴 크루그만이 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인들 사이에 "이러다 우리도 일본처럼 되는거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럴때 자기는 "우리가 일본처럼만 된다면 원이 없겠다!"고 응수한다고. 그만큼 지금 미국 상황이 심각하다는 얘기.

하지만 미국은 기본적으로 전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뿐인 초강대국이고 그 영향력을 바탕으로 빚마저도 역학관계를 뒤바꾸어버려서 빚으로 파산할일은 없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므로 애초에 일본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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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레 거, 말 마. 한마디로 차비다. 한국에서도 공직계나 기업 등에서 뇌물성 떡값을 현장에서 현찰박치기로 줄 때 "거마비를 준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2] 한국에서도 좀 큰 중견기업에 면접보러 가면 면접비를 주지만 이건 말 그대로 "차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몇만원 수준의 금액이다.
[3]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로 집에 돈이 넘쳐나서 취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알바만 해도 먹고 살 수 있으니 편한 일이 아니면 굳이 취직을 하려들지 않았다. 그래서 중소기업에선 생산직 사원을 구하지 못해서 버블시대가 지옥같았다고 한다.
[4] 언제든지 취업 할 수 있는데 일부러 안 하니까.
[5]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225(한국으로 치면 KOSPI200)장중최고가 38957.44 기록. 물론 코스피 시가총액 방식이고 닛케이는 평균가격지수로 방식이 다르나 상당히(!) 높다는 것을 인식하면 된다. 평균가격지수인 다우는 당시 평균 지수는 2000선
[6] 오부치 게이조와 총리에서 물러난 후 재무장관으로 복귀한 미야자와 기이치 콤비 등의 공이었다.
[7] 최근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된 경기 불황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8] 1980년대 신자유주의 개혁을 단행했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도 몇년 간 마이너스 성장률과 디플레이션을 경험하긴 했다. 이 경우는 몇년 간 이지만 일본은 약하긴 해도 20년...
[9] 1999년 이탈리아를 추월한 이후 계속 1위이다. 하지만 국채 발행이 많기에 93%를 국내투자자가 보유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도 금융기관이 70%나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일본은 아직도 GDP대비 3%의 경상수지 흑자국이며, 국채 이자도 1.2%로 작다.(이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저금리 정책 덕분이었다.) 세계 최대의 대외채권국이란 점과 중국 다음가는 외화보유고도 강점. 무엇보다 대부분이 국내투자자라 웬만하면 돈을 빼지 않는다. 고로 모라토리움 걱정은 상당히 낮고,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지 않는다면 결국엔 종말이 불가피한것도 사실이다. 1000조엔에 달하는 빚을 가진 나라의 국채를 낮은 이자에도 기업들이 척척 구매한다는 점에서 일본 특유의 끈끈한 정경유착의 결과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며, 일본 국채의 대부분을 일본 금융기업이 구매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정부가 돈이 없으니 국민들 예금 빼다가 쓴다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정부가 돈을 못갚으면 은행은? 은행이 망하면 예금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그리고 이탈리아는 이제 금융위기로 망했습니다. 꼴등이 하나 더 생길 것 같습니다./하지만 그 쓰나미는 EU를 거쳐 세계를 덮치겠지 
[10] 197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 전 스탠포드대 MBA(경영대학원) 재직 교수인 톰 피터슨 등등 당대의 석학들이 일본을 경계하며 견제하는 사설을 우수수 쏟아냈다.
[11] 그런데 중국 쪽도 부동산 거품이 심각한 수준이다. 게다가 그냥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국제 경제 위기로 수출이 줄면서 국가가 돈을 쏟아부으며 그걸 지탱하는 데(내부적으로 땅을 파헤치거나 유령도시를 만드는 것도 어쨌든 경제성장에 들어간다) 그것도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한 상황이라 거품이 터지는 날에는 일본처럼 뭔가를 해볼 만한 여력도 없이 와르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중국의 경우는 그나마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된 한국, 일본과 달리 중산층의 비중이 적은 편이기 때문에 고성장에 인생. 아니 생존을 건 사람들이 약 십억명 가량 된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 대부분이 거품붕괴와 함께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다면...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그리고 세계경제는 헬게이트



일본에 충격준 임밸런스 조정 ‘플라자 합의’의 교훈

버블 경제가 남긴 돌연변이들
(일본에서 박스카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일본 70년대 풍경

도쿄의 80년대 풍경

80~90년대 일본 패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