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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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영원한 화자 2016. 4. 12. 00:43


요즘은 별일없이 살고 있다. 내 미래는 여전히 물음표지만 '과거는 떠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난 그저 눈앞의 현재와 코앞의 미래만을 보고 살고 있다. 필요한만큼의 돈을 벌고, 어떤 날은 취직 안해도 되겠구나 싶은 정도의 돈을 벌고 뿌듯해 하다가도, 별 소득이 없는 날엔 어디엔가 숨어있던 불안감이 두더지처럼 고개를 들이민다. 맘에 드는 몇 개 회사에 자소서를 넣어볼 요량으로 채용 일정을 메모해 뒀지만 오늘 장을 복기하고, 내일 장을 준비하다 보면 어느새 자정이 훌쩍 넘는다.

요즘의 일상은 이렇다. 3시에 장이 끝나고, 4시까지는 이것저것을 훑어보고 자전거를 타거나 낮잠을 잔다. 요즘은 날씨가 좋아 자전거를 자주 탄다. 수익이 짭짤한 날에는 페달을 돌리는 발이 가볍다. 수익이 좋지 않은 날에는 별로인 기분을 날려 버리기에도 좋다. 마포대교까지 왕복하면 딱 15km정도 되는 코스다. 날씨가 따뜻해지니 여기저기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자리잡은 사람들이 많아졌다.

낮잠을 자거나 쪽잠도 자주 잔다. 8시부터 3시 까지는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지 몰라도 장이 끝나고 나면 참을 수 없는 피로가 몰려온다. 그나마 괜찮다 싶으면 자전거를 타거나 집 근처 뒷산으로 산책을 가고, 운동을 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잠을 잔다. 군대에서 12시에 점심을 먹고 자는 낮잠이 그렇게 꿀맛이었는데 요즘 자는 낮잠이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맞춰 놓은 알람 시간보다 더 자기 일쑤다. 괜히 수마(睡魔)가 아니다.

책은 좀 덜 읽고 있다. 요즘은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있는데, 내 생활도 그리 밝지 않은데 책까지 어두우니 속도가 붙지 않는다. 그 밖에 읽다 만 책들이 많은데 모두 연체돼서 얼른 반납할 예정이다. 틈틈이 AXT를 재미있게 보고있다. 천명관의 인터뷰가 실린 창간호는 모두 품절인지 찾아볼 수가 없다. 도서관에 가서 읽어야 될 듯 싶다. 박민규의 인터뷰는 압권이었다.

4월도 벌써 절반이 갔다. 항상 그렇지만 대체 뭘 했다고 시간이 이리도 빠른지 모르겠다. 두꺼운 외투를 내려놓으면 금방 반팔을 입고 손수건을 꼭 챙겨야 하는 계절이 오겠지. 그때 난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최선을 다했고, 현명했고, 행복하고 코앞의 미래도 그럴 예정이라면 보이지 않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도 그렇겠지, 라고 자위해본다. 그런 의미로다가 내일은 여름휴가 해외여행 패키지를 지를 예정이다. 인생 뭐 있나. 월세 아니면 전세, 정규직 아니면 비정규직 아니면 백수겠지 뭐.

그러고보니 많이 변했다. 정리를 못해서 스트레스 받는 것도 덜해졌고, 불안하거나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뒤돌아보면 그런 것들은 다 쓸모 없는 정력 낭비였다. 미래는 단 한번도 내가 원하는 곳을 바로 향하는 법이 없었다. 돌아가거나 뜨악한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타임머신처럼 목표한 곳에 데려다 주기도 했다. 흥청망청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정신차려보면 언젠가 또 어디에든 내가 원하던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겠지.

종종 나의 글을 재밌게 읽었다거나, 기다린거나 하는 얘기를 듣는다. 기쁘다. 돈을 버는 것 다음으로 기쁜 일이다. 재능이 있는 것인가, 하는 오해를 하게 만든다. 집엔 글쓰기와 소설 쓰기에 관련된 책이 수북하다. 엊그제도 한 권 샀다. 물론 많이 읽지는 않았다. 요즘은 많이 쓰지도 않는다. 게으른 탓이다. CAPITALISM이라기 보단 먹고사니즘의 문제에 봉착해 있다 보니 더욱 그렇다. ‘이야기를 써보려고 노력중이다. 길거리에서 보는 의미없는 장면을 의미있게 보려고 하거나, 우연히 들려오는 타인들의 대화나 전화 통화를 엿듣고는 내 멋대로 상상한다. 아까는 편의점에 다녀오는데 창문을 두고 대화를 하는 부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목소리만 들려왔고, 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두 손을 모으고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의이니 하는 단어가 들려는 것을 보니 재산 문제인가 싶었다. 얼마 전엔 여자 친구가 편의점을 갔는데 어떤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소주 한 병과 컵라면 하나를 사갔다고 말했다. 나는 또 마음대로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간 기가막힌 이야기가 나오겠지. 소설을 써서 대박을 치고 판권이 팔려 영화화가 되고 난 돈방석에 앉고, 그 돈으로 주식을 하고, 투자를 해서 돈을 번 다음에 조물주 위에 있는 건물주가 되어 오늘 먹고 싶었던 오징어 숙회를 맘껏 먹는 아름다운 인생 역정, 또는 인생 역전의 이야기 같은 것들. 고등학교 기숙사에 살 때 취침 시간에 누워 이런 것들을 신나게 얘기하고 있으면 멀리서 기숙사 사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랄하지 말고 자라!”

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