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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화자
흰머리 본문
나이를 먹어갈 수록 내 모습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며 놀라는 경우가 많아진다. 외모,식성, 재채기 소리, 성격, 등등. 후천적인 것도 놀랍지만 유전으로 타고나는 것들이 새삼스레 신기하고도 신비롭다.
그전까지 내가 알아차릴 수 있던 것들은 외모나 아버지와 동일한 곳에 가지고 있는 점이 다였다. 그건 모두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가지고 있고, 느끼고 있던 것들이다. 20대 후반이 되자 이제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유전의 신비를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흰머리다. 인턴을 하던 쯤일까, 눈을 치켜뜨고 찾아야 하나 보일까 말까 하던 것들이 머리를 뒤적이면 이제 쉽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 생활을 시작하자 흰머리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정말 스트레스를 받으면 늘어나는 것인가 의심이 들정도로 말이다. 굳이 흰머리를 찾으려 머리를 뒤적이지 않아도 눈에 띄게 많아져 더 스트레스를 받았다. 흰머리는 유독 이마 오른쪽 부분에 몰려 났다. 아버지한테 말씀드리니 젊었을 때 당신도 뒤통수 한곳에만 몰려났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마디 하셨다. "걱정마라 그래도 우리 집안에 대머리는 없다."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염색하시던게 생각난다. 할머니는 내게 염색약을 물에 개는 걸 시키셨다. 양귀비였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가장 싼 염색약이었다. 플라스틱 통에 그걸 개면 할머니가 머리에 바르셨다. 가장 싸구려 염색약이었으니 전용솔 같은게 있을리 만무했다. 칫솔모가 다 벌어진 낡은 칫솔이 할머니의 염색용 솔이었다. 할머니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엔 내가 발라드렸던 장면이 흐릿하게나마 떠오른다. 염색약을 잔뜩 바르신 할머니 모습이 왠지 낯설었던 것도.
할머니는 염색을 하시기 전에 항상 담배 필터를 준비하셨다. 그땐 아버지가 담배를 피셨기 때문에 재털이에서 몇 개를 빼놓으셨는데 그것 마저 없으면 아마 주워오셨던 것 같기도 하다. 필터는 피부에 뭍은 염색약을 지우는 용도로 사용됐다. 과학적으로 그게 효과가 있는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랬다. 할머니가 씻고 나오신 욕실 한켠엔 버리는 걸 깜빡하신 젖은 담배 필터가 있었다.
아버지도 30대 때부터 염색을 하셨다. 아버지가 쓰셨던, 지금도 쓰시는 염색약은 쎄븐에이트. 한두달에 한번씩 주말 아침이면 윗옷을 벗고 쓱싹쓱싹 약을 바르신다. 생전의 할머니처럼 나를 불러 보이지 않은 곳에 약을 바르라고 시키시기도 했다. 이제 피부에 뭍은 염색약을 지우기 위해 담배 필터같은 것은 필요 없다.
어젠 누나 가게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했다. 거울을 보며 머리칼을 뒤적였더니 흰머리가 부쩍 더 많아진게 보였다. 누나에게 흰머리가 많아졌다는 투정을 부렸다. "염색해줄까?" 아, 이제 나도 염색을 생각해야될 나이가 오다니. 피는 아니 흰머리는 내가 우리 할머니의 손자고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못 속이게 하는구나. 그리 머지않아 나도 내 아들과 딸을 불러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 염색약을 발라 달라는 말을 하는 시간이 오겠구나 생각하니 시간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