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가위 이야기 두번째. 본문

이것 저것/진실 혹은 거짓

가위 이야기 두번째.

영원한 화자 2016. 3. 25. 00:18

구상이나 각본 따윈 없는 가위 이야기 두번째.

 

여태 가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언갈 자주 잃어버리고, 까먹고, 손에 핸드폰을 들고 핸드폰이 어딨는지 찾아대는 멍청함이 좀 있긴 하지만 이랬던 적은 없었다. 펜이 됐든, 사소한 소지품이 됐든 포기하던 찰나에 혹은 청소를 하다 우연히, 그것도 아니라면 이사하던 날에라도 그 물건들은 ', 속았지?' 하며 나타나곤 했다. 그것들의 대부분은 부피가 작거나 아니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소한 물건들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가위는 다르다. 부피가 작지도 않고, 사소한 물건도 아니다. 사실 사소한 물건이라고, 아니 사소한 물건인지 아닌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그런 물건이다. 그러나 가위는 사소한 물건이 아니었다. 나는 주방에서 칼보다 가위를 더 애용하고 있었다. 식료품 포장을 자를 때도, 파를 자르고 김치를 자를 때도, 맥주를 딸 때도-가위 날 반대편엔 맥주를 딸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가위를 애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료품 포장은 아쉬운대로 커터칼로 자르고, 파도 칼로 자르고 있지만 아직 김치는 먹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칼로 김치를 자르는 건 내키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별거 아니지만 괜히 하기 싫은 뭐 그런 상황이 있지 않은가. 내 기준에서는 칼로 김치를 자른다면 내 손에, 도마에 온통 김치국물을 묻혀야 하기에 칼로 잘라 먹는 김치는 오직 어머니 혹은 식당에서만 이용 가능한 것이다. 김치를 먹지 않은 날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자의적으로 김치를 먹지 않은 것은 캐나다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할 때 이후 처음이다. 그런대로 살만 하지만 엊그젠가 컵라면을 먹을 때는 하마터면 김치를 칼로 자를 뻔했다.

 

지난 번 글을 올리고 나서도 생각만 나면 집을 뒤졌다. 냉장고는 이미 샅샅이 뒤졌기 때문에 애꿎은 수납장만 몇 번씩이나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점점 내 입에서 욕이 나오는 횟수가 잦아지고 있다. 이 빌어쳐먹을 가위는, 가위들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내 손을 잡아봐.

어디든 함께 갈 테니.

너 없이 혼자선,

그 어떤 의미조차 될 수 없어.

뭐라고 말 좀 해

왜 자꾸 숨어있어.

가위야 어디 있니.

 

가위를 찾았다. 의외의 곳에 가위 두 개가 사이 좋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그곳에 있는게 이상했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보니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몇 주전 여자친구가 집에 왔을 때였다. 마침 내가 맨날 더럽다고, 좀 닦고 다니라고 구박하던 페니로퍼를 신고 왔었다. 잘됐다 싶어 구두를 닦아줬다. 그때 구두 닦는 용도로 남겨둔 티셔츠를 자르는데 가위는 자신의 사명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의문은 남아있다. 대체 왜 가위 두 개가 모두 거기 있냐는 말이다. 내가 가위손도 아니고 티셔츠 하나 자르는데 가위 두 개를 한꺼번에 쓸 일도 없고. 가위 새끼들은 연애라도 하는 듯이 신발장 위 잡동사니 틈에서 몸을 포개고 있었던 것이다. 망할 것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쨌든 가위를 찾았다. 이젠 라면을 먹을 수도 있다. 비타민씨 공급용으로 산 사과즙 봉투도 간편하게 자를 수 있다. 맥주를 더 이상 숟가락으로 따지 않아도 된다.


사소한 것들은 사소한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게 존재하고 있다. 사소하다 생각하지 말고, 당연하다 여기지말고 감사하고 살지어다. 나도 나름의 쓸모가 있겠지. 어디선가는 내가 가위를 찾듯 나를 찾고 있겠지. 그러니 나를 고용하라 이 새끼들아. 사랑해 가위야. 이제 우리 헤어지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