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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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공간/ijuswanaseing

기형도.

영원한 화자 2015. 2. 10. 23:26


어젠 오랜만에 대학로에 갔다. 알고지내는 박사님을 만나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턴때 여러모로 도움을 많이 주시고 챙겨주시던 분이라 인턴이 끝난 후에도 가끔 만나뵙고 식사를 한다. 여느 때처럼 후배지만 동갑내기인 J와 같이 뵀다. 브런치 카페에서 푸짐GKS 점심을 먹고, 맘에 꼭 드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 뒤 헤어졌다. 습관처럼 발걸음은 대학로 알라딘 헌책방으로 향했다.


금요일 업무 시간에 몰래 읽은 기사에 나온 <에센셜리즘>이란 책을 샀다. 자기계발서를 좋아하진 않으나 직장인이 되고나니 어느 정도의 유용성을 느끼고 있다. 주말에 몸이 움직여지질 않으니 머릿 속으로라도 자기 계발을 해야 맘의 위안이 되는 느낌이랄까. 몇 권의 소설 책을 더 사고 싶었지만 곧 이사가는데 짐만 늘릴 것 같아 표지만 만지작 거렸다.


한국 문학 코너를 어슬렁거렸다. 읽은 것들, 읽지 않았지만 읽어야 할 것들, 읽지 않았지만 읽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나쳤다. 그리고 <기형도 전집>을 발견했다. 책 한 권으로 된 전집이라니. 삶은 참 얄궃고 허망하다. 한 권으로나마 추억하기 위해 책을 집어들었다.


카페에 앉아 책을 폈다. 시들이야 이미 읽어본게 많았기 때문에 산문을 읽고 싶었다. 생각해보니 그의 산문을 읽어본 적이 없다. '짧은 여행의 기록'을 읽었다. 


중앙일보에 입사한 기형도는 어느 해엔가 여름휴가로 여행을 갔다. 대구에서 '이상한 소년' 장정일을 만났고, 전주에서는 강선생을,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는 우연히 이한열의 어머니를 만났다. 땀과 피로에 젖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태양은 따가웠을테고, 땀에 쩌든 옷은 비루한 삶만큼 거추장스러웠을게다. 여행이라기보다 일부러 고행의 길을 떠난 수도승 같아 보였다. 짧은 여행은 이상으로 가고자하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는 결국 다시 일상에 떠밀려 영등포 역으로 돌아왔다. 


"나는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일상들을 향해 기차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물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다시 너절하게 떠오르리라. 그렇다면 너 지친 탐미주의자여, 희망이 보이던가. 귀로에서 희망을 품고 걷는자 있었던가? 그것은 관념이다. 따라서 미묘한 흐름이다. 변화다. 스스로 변화하기. 얼마나 통속적인 의지인가. 그러나 통속의 힘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기 구원이란 없다. 나는 신이 아니다. 차창 밖 국도에 붉은 꼬리등을 켠 화물 트럭들이 달린다. 멀리 보이는 작은 불빛 하나하나마다 일생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흘러가버린 나날들에게 전하리라. 내 뿌리없는 믿음들이 지금 어느 곳에서 떠다니고 있는가를." - 짧은 여행의 기록 中


기형도의 산문을 읽고나니 글이랍시고 내가 적어온 것들이 부끄러워졌다. 그의 글에 비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내 글은 글이라기보단 단어의 나열에 불과하구나. 지금 내 나이보다 적은 나이에 써 내려간 것들이라니. 부끄럽기도, 그의 죽음이 더욱 아쉽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