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케인즈주의에 대한 읽을만한 글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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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즈주의에 대한 읽을만한 글들.

영원한 화자 2013. 4. 4. 14:03

"케인즈주의의 한계, 기업·금융의 사회적 소유로 보완해야."

장상환 경상대 경제학부 교수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마르크스 경제학 전공 교수 가운데 하나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을 맡아 주요 정책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고 최근까지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 소장을 맡아왔다. 그는 거대한 변화가 이미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강부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더라도 노동자 대중의 불만을 언제까지나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 이번 위기를 넘기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오히려 10년 전 외환위기처럼 노동자 대중에게 희생을 전가하고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경제 위기의 원인은 첫째, 자본의 집중이고 둘째, 금융의 극단적인 투기화고 셋째, 소득분배 불평등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생산을 확대하고 자본을 축적한다. 지금 은행에 돈이 없나? 부동자금이 500조 원이라고 한다. 기업들이 돈이 없나? 이익 잉여금이 350조 원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주가가 떨어지니까 사람을 마구 자른다. 대기업과 금융기관, 부유층에 돈이 몰리면서 저소득 계층은 쓰고 싶어도 쓸 돈이 없다. 점점 더 참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있다. 이대로 가면 노동자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다."

- 위기는 왜 자꾸 반복되는가.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생산의 사회적 성격과 소유의 사적 성격 사이의 모순이다. 기업의 이윤추구 경쟁이 과잉생산을 강제하고 과잉생산이 과잉투자를 추동하고 노동자들의 임금과 소비를 제약하면서 공황을 낳게 된다. 그래서 케인즈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했는데 유효 수요를 늘리고 소득 재분배를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공황을 극복할 수 없었다. 케인즈주의는 경기침체와 스태그플레이션을 낳았고 신자유주의를 불러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목격하고 있다."

- 신자유주의가 아니라면 다른 무슨 대안이 있나. 이를 테면 다시 케인즈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나. 
"불황의 원인이 기본적으로 수요부족 때문이라고 본다면 케인즈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케인즈주의는 과잉생산과 과잉투자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반복되는 경제위기를 막으려면 케인즈주의 복지국가 모델에 기업과 금융의 통제를 결합할 필요가 있다. 재정민주주의와 금융민주주의, 기업민주주의를 동시에 고민해야 한다. 노동자와 채권자, 협력업체, 정부 대표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기금을 조성해서 주요 기업의 사회적 소유를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금융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할 필요도 있다. 나는 금융기관은 모두 국유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지난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계속해 왔다. 지금 위기는 그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를 뒤집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나라는 자유주의에서 케인즈주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신자유주의로 직행했다. 압축적 경제성장이 압축적 모순축적이 된 셈인데 그만큼 해결도 압축적으로 할 수 있다고 본다. 외국의 실패 사례들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강부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지만 이대로 가면 시스템이 통째로 무너지게 된다. 엄청난 반발이 이미 시작됐고 기득권 계급도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는 걸 원치 않을 거라고 본다. 이명박 정부가 역주행을 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 엄청난 규모의 재정지출을 이미 단행하고 있고 추가경정예산도 더 편성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무분별한 감세 정책도 수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양극화에 대한 해법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 구체적으로 노동자 대중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졸업하자마자 백수로 내몰리게 된 젊은이들이 나서서 실업급여를 달라고 아우성을 쳐야 한다. 취업한 적도 없는데 무슨 실업급여냐고 하겠지만 좀 더 적극적인 일자리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집 없는 사람들은 주거 보조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한다. 국민들 누구나 식구 수만큼 방을 확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누가 돈을 내느냐고? 돈은 얼마든지 있다. 제대로 돌고 있지 않을 뿐이다. 필요하다면 세금을 더 걷고 국채를 더 발행하면 된다. 우리 국민들은 그동안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고 나 혼자 살겠다고 발버둥을 쳤는데 이제는 그 사다리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국민들 무서운 줄 알게 만들어야 한다."

- 결국 권력의 문제가 될 텐데 진보진영은 헤게모니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100만명이 촛불을 들어도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는 패배감도 있다.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보나. 
"변화는 캠페인만으로 되지 않는다. 정부를 움직여야 할 텐데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본다. 국민들의 저항과 반발이 거세지고 차기 집권이 불안하게 되면 아무리 강부자 정부라도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미 변화는 시작됐다. 좀 내주지 않으면 모두 다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어야 한다. 기득권 세력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개혁도 가능할 거라고 본다. 한꺼번에 뒤집는 혁명은 불가능하겠지만 개혁이 누적되면서 조금씩 새로운 단계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출처 이정환 닷컴




케인스주의가 해법일까? / 정성진

작년 여름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이번 세계경제 위기는 1980년대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위기라고 흔히 이야기한다. 또 경제위기가 심화되면서 정부의 시장 개입과 규제 강화, 국유화 조처가 확산되자, 신자유주의 시대는 종언을 맞이했다고도 한다. 아울러 오늘날 경제위기에 대한 처방은 케인스주의로 복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케인스주의적 분석과 처방은 이제 새로운 지배 이념으로 정착한 듯하다. 예컨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자유주의를 전도했던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 타임스>와 같은 주류 매체들이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다”라고 개종 선언을 한다든가, “지금은 케인스적 처방을 요구하는 케인스적 상황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위기에 대한 케인스적 진단과 처방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부정확하고 부적절하다. 우선, 이번 세계경제 위기는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 훨씬 전인 70년대 이후 이윤율의 장기저하에서 비롯된 장기불황의 연장선상에서 폭발했다. 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으로 출현한 것으로서, 이는 금융화, 사유화, 세계화 및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 강화를 통해 불황을 타개하려는 전략이었다. 신자유주의 전략은 이윤율의 장기저하 추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쌍둥이 거품(닷컴 거품과 주택 거품)에서 보듯이, 일시적인 거품 호황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70년대 이후 장기불황 추세 속에서도 30년대와 같은 대공황에 빠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럭저럭 굴러올 수 있었다. 2007년 미국의 주택 거품 붕괴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세계경제 위기는 이제 거품 키우기를 통해 대공황의 도래를 지연하려는 신자유주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음을 입증하는 사태이다.

오늘날 세계경제 위기 국면에서 케인스주의가 부활하는 배경에는 케인스주의 덕분에 자본주의가 30년대 대공황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는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30년대 대공황은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영구 군비경제와 대량의 자본 파괴를 배경으로 한 이윤율의 상승과 함께 종식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 자본주의 주요 국가가 적자재정을 중심으로 한 케인스주의를 본격적으로 채택한 것은 1970년대 이후 장기불황이 시작되면서부터인데, 이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촉발하여 신자유주의로의 정책 전환으로 귀결되었다. 경제위기의 문제를 유효수요의 부족이나 금융 불안정성과 같은 유통과 금융의 문제로 파악하는 케인스주의로는 자본주의 생산관계의 내적 모순이 필연적으로 야기하는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된 경제위기를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늦출 수 있을 뿐 근본적으로 해결하거나 완화할 수 없다.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정책체제(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 모순에서 비롯된 위기이므로, 케인스주의라는 또다른 정책체제로 회귀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경제 위기는 현 체제하에서는 지난 세기 30년대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능가하는 야만과 파괴의 과정을 통해 이윤율 상승의 새로운 기초가 마련돼야만 극복할 수 있다. 진보 진영이 이미 지배계급 이데올로기로 전화된 케인스주의(“좋은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운동과 민주적 참여계획경제 구현에 전력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성진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등록 : 2006.01.12 17:44수정 : 2006.01.13 16:46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

인터뷰/<마르크스와 한국경제> 쓴 정성진 교수

“마르크스주의를 모두 다 싸잡아 역사의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모두가 새로운 걸 추구한다고 나서고 있죠. 마르크스주의는 충분한 비판 뒤에 버려졌는가라는 물음은 떨칠 수 없었고 그렇잖은 버림은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오늘 한국경제의 구조와 모순을 분석한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펴냄)의 저자 정성진 경상대 교수(49·경제학)는 10일 ‘지금 왜 다시 마르크스 경제학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자본이 세계 구석구석에 전파돼 자본의 세계화는 돌이킬 수 없는 것 같기에 그런 현실의 ‘개량’에 더 많은 눈을 돌리는 시대에 왜 마르크스주의일까? 이런 궁금증 때문에 옛것의 부활 자체가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책이다. 여기에 실린 몇 편의 글은 국내외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토론과 검증을 거친 것이며, 또 몇 편은 진보 진영 안에서 한국사회의 성격 논쟁, 1997년 경제위기 원인 논쟁 등을 불러일으킨 글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노동가치, 잉여가치율, 이윤율 저하 경향 같은 마르크스주의 용어들은 조연이 아니라 주연이다. 거기에서 직접 한국경제의 진단이 나왔다. 예컨대, 그는 ‘97년 경제 위기’의 원인과 관련해 금융위기설을 부정하고 1986~96년에 이미 이윤율 저하가 뚜렷했음을 확인하며 “1997년 위기는 단순한 금융 위기가 아니라 자본축적의 구조적 모순이 심화한 결과”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래서 97년 이후에 심화한 신자유주의의 본질은 ‘금융주도 축적체제’가 아니라 “이윤율 회복을 위한 국내외 자본의 공세”이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와 경제적 종속의 심화”다. 금융주도 축적체제는 현상의 하나일 따름이란 얘기다. 그래서 97년 이후는 노동계급에게 ‘87년 체제’의 붕괴이며 새로운 노동자운동의 주체로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형성이다.

이런 결론은 그에게 중요하다. “오늘 진보 진영에 요구되는 것은 금융화론자들처럼 ‘나쁜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로 대체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금융적·군사적 제국주의의 지배와 자본주의 착취 체제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투쟁과 연대하는 것이다.”(42쪽)

이 책의 밑바탕을 이루는 건 트로츠키주의다. 그는 트로츠키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버림받은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였을 뿐, 고전 마르크스주의와는 관련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맥을 이은 트로츠키주의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나 레닌과는 관련이 없는 ‘위로부터의 국가자본주의’였을 뿐이며, 트로츠키주의는 ‘노동자의 자기 해방’과 ‘아래에서 일어나는 혁명’을 잇는 마르크스주의다.

그는 진보 진영에도 스탈린주의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국사회 성격’ 논쟁과 관련해 한때 진보 진영을 뜨겁게 달궜던 옛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도 그런 비판의 대상이다. “독점자본론으로 본다면 그 대안은 ‘반독점’일 수밖에 없지요. 그건 근본문제보다는 독점 구조의 해체에 더 눈을 돌리게 하는, 근본문제의 회피입니다.”


그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근본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세계화 시대에 경쟁이 심화하고 노동 착취가 격화하는 현상의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대안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지요.”

정 교수는 “세계화에 반발한 1999년 ‘시애틀 투쟁’ 이후에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일면서 여러 대안들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는 데 이 책이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에 이어 그가 지지하는 트로츠키주의를 본격 조명하는 두번째 책의 저술을 계획하고 있다.



[책과 세상] '대공황해법' 케인즈 이론의 문제점은?

■경제고전(다케나카 헤이조 지음, 북하이브 펴냄)
입력시간 : 2012.02.03 17:20:49
수정시간 : 2012.02.03 08: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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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게이오대학에서 ‘문제해결을 위한 경제고전’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됐던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일본 고이즈미 내각에서 관료로 일했던 저자가 현실경제와 유리되지 않은 경제이론, 경제사를 설명하면서 고전을 통해 경제를 보는 눈과 문제해결력을 기르도록 하고 있다. 경제고전 중에서도 난해하고 읽기 어렵다고 생각하기 쉬운 경제고전을 알기 쉽게 해설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밀턴 프리드먼의 ‘자본주의와 자유’까지 경제사에 영향을 미친 10권의 저서를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있다. 토머스 로버트 맬서스, 데이비드 리카도,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너드 케인즈, 조지프 슘페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제임스 뷰캐넌도 다뤘다. 

각 장은 각 시대에 경제학자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소개한다. 경제와 정책을 고찰할 경우 기본은 ‘해결할 문제는 무엇인가’다. 애덤 스미스에게 해결할 문제는 ‘혼란한 사회질서를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였으며 케인즈는 기존의 경제이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대공황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1930년대 대공황의 해법으로 케인즈 이론이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불황이 찾아올 때면 위기 극복을 위해 케인즈를 부활시킨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며 프리드먼의 이론으로 케인즈 주의를 공격하기도 한다. 

케인즈에 비판적인 학자들은 그가 간과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시장도 때로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 시장의 실패가 나타나지만 한편으로는 정부도 실패한다는 점이다. 시장도 완전하지 않지만 정부도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케인즈는 정부의 실패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비판적인 학자들의 지적 포인트다. 두번째는 케인즈의 주장이 비대칭적인 리스크를 가졌다는 것이다. 불황으로 인해 확대된 공공사업은 호황이라고 해서 축소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정부가 발주한 일은 기득권화해서 이해당사자들이 공공사업의 축소를 극구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애덤 스미스의 세계에서는 분업이 증가하고 사회가 부유해져 만인이 점차 유복해진다. 그러나 데이비도 리카도의 세계에서는 오직 지주만이 이득을 얻고 노동자는 최저생활에 묶여 있어야 할 운명이 된다. 

저자는 그러나 그들이 경제사상을 앞세워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가 위기의 시대에 경제고전을 꺼내드는 것은 그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라는게 저자의 시각이다. 1만5,000원.


[43호]사민주의와 케인즈주의

역사속의 사민주의 (6)

시리즈 순서

1) 개관 - 역사의 범죄자 혹은 뻔뻔하고 파렴치한 사민주의자들의 역사
2) 학살의 역사 - 독일에서 벌어진 사민주의자들에 의한 노동자 도살
3) 이중대의 역사
4) 식민지 민중의 고혈을 짜는데 빨대를 들이댄 사민주의자들
5) 가부장제의 위선적인 수호자 사민주의자들
6) 사민주의와 케인즈주의
7) 사회적 분업과 직접 민주주의 
8) 산별노조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잭 웰치를 비롯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자유주의 전도사들이 반성문을 속속 발표하고 있다. 최고의 주식투자가로 전세계 젊은이들의 망상을 조장했던 워렌 버핏도 두손두발 다 든 채 공황을 떠벌이고 있다. 

2008년도 노벨상 수상자였던 크루그먼은 요즘 신자유주의 반대자였던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신자유주의자들의 개방 주장에 대하여 뜬금없는 표정을 지었던 동아시아의 경제관료들에게 이죽거렸던 인사였다. 다시 말해 크루그먼조차 전향자, 좀 더 약삭빠른 전향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요즘은 권위의 붕괴시대다. 시장의 반응이니, 시장의 신뢰니 하는 말을 주문처럼 외며 돈놀이의 논리로 세상을 유린하던 자들이 이제 같은 입으로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정부의 개입을 악행으로 몰던 자들이 너도 나도 신속하고 과감한 정부의 개입을 주장하고 있다. 

국제적인 공조를 강조하며 전 세계 20개국이 동시에 경기부양책을 진행하고, 무너진 금융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하고 있다. 언론에서는 그동안 세상을 풍미했던 신자유주의 시대가 가고 케인즈주의 시대가 다시 오게 된 것이 아니냐는 너스레를 떨고 있다. 

권위의 실종으로 두려움에 떠는 자들

이들이 갑자기 말을 바꾸고 호들갑을 떠는 이면에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작동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자신들의 회의가 대중에게 공유되는 것이 사실은 더 두려운 것이다. 

이들 모두에게 위기라는 말은 그들 권위의 위기이다. 펀드매니저, 은행가, CEO, 정부관료, 그리고 소위 경제칼럼니스트라는 사람들은 이제 조롱과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가하면 시장이라는 말의 권위 또한 추락했다. 불안하고 불합리한 체제로 인식되고,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체제라는 것이 날로 폭로되었다.

좋은 시절로 윤색되고 있는 케인즈주의가 등장했던 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케인즈주의가 세계화된 것은 2차대전 직후였지만, 이미 미국에서는 대공황을 겪고 나서 뉴딜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요구된다는 식의 정책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흐름이 형성됐었다. 결국 2차대전이라는 미증유의 학살이 일어나고 난 다음, 자본가들이 현실의 막막함에 귀뺨을 맞고 망신을 당했을 때 지금처럼 다급한 정책전환이 모색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 자본주의 주역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이 권위를 보완하는 세력이 필요했고 그 세력들이란 미국에서는 공산당도 입당했던 민주당이었다면, 유럽에서는 사민주의자들이었다.

사민주의자들의 어부지리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승전국 미국을 제외하고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그 권위를 상실하였다. 자본주의를 이끌던 자본가들은 영국에서는 파시즘과의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나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의문에 답을 해야 했다. 독일에서는 자본가들이 나치당원들이었기에 그들은 패전과 나치즘이 저지른 끔찍한 만행의 공범 취급을 받아야 했다.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무분별한 과잉생산과 대중의 궁핍이 대공황에 이어 전대미문의 사상자를 낸 2차대전으로 이어졌다는 자각은 노동자나 자본가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궤도 수정을 요구했다. 

전후의 폐허 위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미국의 원조라는 도움이 없었다면, 유럽은 말 그대로 우왕좌왕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1500억 달러는 족히 넘었을 무상원조가 마샬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고, 최고의 수혜자는 말할 것도 없이 영국과 프랑스였고, 그 뒤를 독일과 이탈리아가 이었다. 

소위 적화의 위험은 독일국경선에 배치돼 있었던 4만대가 넘는 T-34탱크만이 아니었고, 궁핍한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조를 보내고 있던 대중들의 불온한 기운이었다. 이런 불온한 기운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현금다발이었고, 체제보존을 위한 양보가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양보를 이용해 나치즘과 파시즘 앞에서 가장 무기력한 세력이었던 사민주의자들이 파시즘의 폐허 위에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그것도 관리되어지는 자본주의라는 수십 년간 이어져온 사민주의자들의 기대를 갖고서 말이다.

케인즈주의의 한계

케인즈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이라는 자본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생산의 무정부성이 유지될 수 있는 수요를 창출하는데 정책의 초점을 맞춘다. 경제성장이 지속되기 위해서 적정한 규모의 인플레가 용인되었고, 이에 따라 생산은 늘고 고용도 확대되고 임금도 인상되면서 확대된 생산에 걸맞은 수요가 창출되는 것이 케인즈주의자들의 바램이었다. 실제 20년간에 걸쳐 고도성장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전략은 영원히 먹혀 들어갈 것 같았다.

그러나 케인즈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무한하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인구는 늘어나고, 그에 따라 수요는 점진적으로 확대되어야 하고, 이에 따라 일자리도 늘어나야 한다. 만약 인구가 기대만큼 늘어나지 않는다면 소비자는 소비를 계속 확대해야 한다. 

전후에 수요 자체가 있을 수 없었던 유럽이나 일본은 엄청난 규모의 소비시장이었던 미국에 물건을 파는 것으로 생산 확대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서 내수시장이 확보되자, 무역의존도가 조금씩 낮아지면서 내수 또한 성장기반이 되기 시작했다. 시장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한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원은 결코 무한하지 않았다. 언제나 낮은 비용으로 자원이 확보될 것이라는 기대는 석유파동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고분고분한 노동력의 공급이 원활할 것이라는 기대는 68혁명으로 젊은이들이 방종(?)으로 빠지며 날라 갔다.

그러면 유한한 자원이라는 한계, 이윤율의 한계에 부딪힌 경제적 동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한한 자원, 즉 광물자원이건 화석연료건 인구이건 산업시설이건 간에 최대한 쥐어짜는 것이 한 방법이다. 자본이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인 이윤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쥐어짠 과실은 자본에게 돌아가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나온 배경은 이러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수동적인 추종자

신자유주의 혹은 워싱턴 컨센서스라 불리는 막가파식 자본주의의 시작은 석유파동 이후 끝장이 난 케인즈주의 하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장기침체를 견디지 못한 자본가들이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면서 이루어졌다. 

전후의 타협이 거추장스러웠고, 그 타협을 유지하는 비용이 계속해서 늘어나자 자본가들은 제도화된 전후 질서를 집요하게 공격하면서, 과잉화된 자본의 과실만을 따먹으려고 달려들었다. 

이러한 자본의 공격 앞에 속절없이 나가떨어진 것이 사민주의자들이다. 작은 정부니 규제완화니 세계화니 하는 담론 앞에서 사민주의자들은 고작 인간의 얼굴을 하니 어쩌니 하는 도덕적 명분만을 내세웠다. 

결국 노동당 블레어가 부시의 푸들이 된 것처럼, 각국의 사민주의자들은 박력 있게 신자유주의에 대해 저지선을 치지 못하고 그저 끌려갔을 뿐이다. 그리고 ‘제 3의 길’이니 뭐니 하면서 새로운 타협모델을 짜는데 골몰했을 뿐이다.

또다시 권위의 실종에 동요하는 사민주의자들

케인즈주의든, 신자유주의든 사민주의자들은 적극적인 역할을 해 온 적이 없다. 결국 상황에 수동적으로 대응했던 것이 그들의 유일한 전략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1세기 만에 처음 도래했다는 大경제위기에 대해서도 사민주의자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금융자본이 기둥뿌리까지 흔들리자 다급한 맘에 국가라는 거인을 불러 세우는 일조차 자본가들에게 뒤쳐졌다.

케인즈주의는 사민주의자들에게 타협모델이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그들은 세계화된 금융자본과 타협을 끌어내는데 골몰할 뿐이었다. 사실 사민주의자들의 경제모델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타협의 모델이 가지는 유사성으로 사민주의자들의 경제정책을 규정할 뿐이다. 이제 이 상황에서 사민주의자들이 어떤 타협모델을 들고 나올 지가 궁금할 뿐이다.




케인즈주의의 귀환을 마냥 반길 수 없는 까닭

오마이뉴스 | 입력 2008.10.17 18:23 | 수정 2008.10.17 18:24 | 누가봤을까?

[[오마이뉴스 최광은 기자]

지금의 세계적 금융위기를 1929년의 대공황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대공황 이전의 자유방임 자본주의가 케인즈주의적 수정자본주의 시대로 전환되었던 것처럼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는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넘쳐난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상황을 놓고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들 주관적 희망을 피력하고 있을 뿐이다.



10일 미 워싱턴 D.C에서 열린 IMF 선진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 참석한 부시대통령. 왼쪽은 헨리 폴슨 미 재무장관, 왼쪽은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

ⓒ EPA=연합뉴스

자본주의 자체가 이제 끝장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에서부터 금융 주도 글로벌 축적체제가 끝장나는 것 아니냐는 의견, 일시적 위기일 뿐 금융시장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할 것이라는 의견까지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이 드러나고 있는데, 관심사는 진보진영의 현 위기에 대한 분석과 대응 방향이다.

금융시장 자본주의는 파산한 것인가?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해졌던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이번에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종언'을 선언하기까지 했는데, 그의 호들갑이 그리 진지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프랑스와 독일도 미국식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종식과 새로운 금융시스템 구축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렇지만 사실은 국제 금융질서의 주도권 재편을 노린 발상에 불과하다.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국가와 시장의 새로운 균형"을 말했을 뿐, 무슨 대단히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끝장을 보고 있으니 이제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선동하자는 이야기는 일단 논외로 하고,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변화 가능성에 대해서만 우선 간단하게 살펴보자.

제조업이 약한 미국 경제가 미국 GNP의 40% 가량을 차지하는 금융산업을 대폭 손질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월가의 주요 투자은행들이 몰락한 것은 맞지만, 이들 투자은행의 기능은 기존의 상업은행과 결합하여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다.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규제 강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그 자체가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대규모의 공적자금 투입과 부분 국유화 논의는 대규모의 체질전환을 위한 예고편이라기보다 물에 빠진 기업들을 일단 살리고 보자는 식의 임기응변책에 불과하다. 미국 정부 스스로도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 금융산업에 대한 감독이 강화되고 일부 파생금융상품 거래에 대한 규제가 도입되겠지만 경제 전반이 국가 주도의 규제 위주로 회귀할 가능성은 없다. 물론 그것이 앞으로 더 큰 위기를 불러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케인즈주의의 귀환을 마냥 반길 수 있나?

올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폴 크루그만 교수는 최근 미국의 구제금융과 관련하여 "1990년대 초 스웨덴 정부가 실시했던 방안, 즉 금융시스템을 부분적, 일시적으로 국유화하는 대책은 이번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훨씬 좋은 방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부진한 소비지출과 고용을 자극할 경기부양책"을 실시하라고 주문했다. 전형적인 케인즈주의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미국의 37, 38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미국의 대공황 극복에 기여한 케인즈를 칭송하며 "우리는 모두 케인즈주의자다"라고 외친 바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닉슨 재임 기간 동안 미국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케인즈주의와 결별하게 된다.

그 케인즈가 다시 부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섣불리 시카고학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종언, 케인즈주의의 귀환을 단정할 수는 없다.

미국발 세계적 금융위기 속에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포스트 워싱턴 컨센서스, 중국식 국가주도 경제발전 모델로 간주된 베이징 컨센서스의 영향력이 다소 세어지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러한 방향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설령 그런 합의가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확대로 금융위기의 본질 자체를 해소할 수 있는가. 케인즈주의의 귀환이 신자유주의 시대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위기 대응책이 될 수 있는가. 국가 개입이 최소화된 시장이 아니라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시장을 만들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국가 대 시장' 프레임을 넘어서야

한때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강조한 밀리반드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한 플란차스 사이의 치열한 국가론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한 실체의 두 측면이 각기 달리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굳이 이 밀리반드-플란차스 논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의 최소 공통성은 이러한 국가라는 매개가 없이는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그 근저에는 계급적 속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국면에 따라 국가의 성격, 그 위상이나 역할이 다양하게 표현될 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경쟁국가도 적극적으로 경제 전반에 개입해왔다. 노동유연화와 공공부문 사유화, 광범위한 규제 완화, 자본시장 육성을 위한 대대적인 지원 등과 같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핵심적인 역할은 바로 국가가 해 온 것이다. 때로는 권위주의적 수단을 동원하기도 하고, 수탈적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장과 국가를 허구적으로 대립시켜온 신자유주의자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자들의 프레임에 갇힌 채 허우적댄 신자유주의 비판자들이 있었다.

동아일보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이란 사람은 9월 25일자 동아일보 칼럼 '멜라민과 신자유주의'에서 신자유주의가 몰락했다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럼 중국식 국가주도 자본주의를 하자는 것이냐며 '멜라민'이 '금융위기'보다 더 위험하다는 황당한 논지를 폈다.

"좌파는 케인즈주의와 신자유주의 논쟁에 끼어들어서 국가의 역할을 케인즈주의보다 더 강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좌파 경제학자도 있는데, 국가의 역할 강화로 초점을 맞출 경우 동일한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다.

금융적 팽창은 자본의 불가피한 운동과정이다. 설사 금융산업 전반을 국유화한다 하더라도 자본의 속성 자체가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관료적 국가 개입만으로는 노동자와 국민 대중에게 위기의 고통을 떠넘기는 것을 막아낼 수 없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단초는 국가와 시장 사이의 시소게임에서 한 발짝이라도 벗어나면서 국가와 시장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지금은 '국가 대 시장' 프레임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한데, 그 핵심은 국가와 시장의 대립을 넘어선 사회적 조절과 민주적 통제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를 위한 적극적 수단을 찾아내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를 어떻게 가동할 수 있느냐다.

위기가 저절로 기회가 되지는 않는다

미국식 금융시장 자본주의가 적어도 표면적으로 위기에 처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가 이를 넘어서려는 진보세력에게 저절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공황이 보다 심화되어 파국으로 치달아 자본주의가 스스로 무덤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순진한 생각은 또 없다.

만일 지금처럼 자본주의 이후를 대비할 대안과 세력이 부재한 상태에서 사태가 그런 방향으로 급격하게 전개된다고 하면, 모두가 고통 받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더 크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자본가들은 늘 그 고통을 노동자를 비롯한 국민 대중에게 전가시켜왔다.

1990년대 이후 보다 가속화된 '금융 세계화'가 국가간, 계층간 소득 불평등을 더 심화시켰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제노동기구(ILO)도 16일 발표한 '금융 세계화 시대의 소득불평등'이란 보고서에서 이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해주었고, "최근의 글로벌 금융·경제위기는 향후 소득격차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일시적 미봉책으로 금융자본의 위기를 해소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계 시민이 겪어야 할 삶의 위기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 분명하다. 피해 대중들을 저항의 흐름으로 연결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할 책무가 진보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