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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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공간/ijuswanaseing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영원한 화자 2018. 11. 28. 14:48


남미 배낭여행을 하던 중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 도착했을 때다. 비교적 발전이 덜 된 에콰도르를 찍고 온 리마는 그야말로 '대도시'였다. 특히 내가 묵었던 숙소가 있는 곳인 미라플로레스는 외교관, 주재원들의 공관이 있는 고급 주택가-한국으로 치자면 UN빌리지나 성북동 같은 곳-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한국의 대도시보다 더 도시같았다. 여행하다 거의 처음으로 한국인을 만나 이것저것 정보도 얻고, 쉬며 에너지를 재충천했다. 다음 목적지는 사막으로 유명한 '이까'라는 도시였다. 

한국인 여행객들과 헤어져서는 길을 나섰다.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렇게 저렇게 버스를 타고 오후 3~4시쯤 이까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숙소를 잡기위해 호스텔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들른 곳에도 방이 없었고, 두번째 들른 곳에서도 방이 없다고 했다. 뭐지? 대여섯 군데를 돌아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이 없었다. 알고보니 부활절이라고 한다. 군대에서 세례를 받은 짝퉁 카톨릭 신자가 부활절인지 뭔지 알 수가 있나. 남미 대륙은 식민지배를 했던 스페인의 영향으로 대부분 카톨릭인데 부활절은 그야말로 큰 '명절'이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이까는 모든 숙소들이 그렇게 다 차 있었다. 계획했던 사막과 오아시스 구경, 샌드 보딩, 버기카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사막구경 대신 흙먼지만 뒤집어 쓴 채 마추픽추를 보러 쿠스코로 향했다. 여행을 하며 맞은 최초의 '의외의 상황'이었다. 

이 때의 일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나는 요즘 부쩍 '인생은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걱정해봐야 걱정하던 일이 모두 생긱지도 않을 뿐더러, 이놈의 인생은 온갖 의외의 상황과 우연으로 똘똘 뭉쳐 흘러간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절대 영업은 못해"라고 염불처럼 외우고 다니던 말이 무색하게 나는 벌써 5년째 영업을 하고 있다. 내가 비웃던, 그리고 무시하던 놈들 중에 나보다 잘 나가는 놈들은 이제 손가락, 발가락을 다 합쳐도 셀 수가 없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었고, 공부를 할꺼라고 말했는데 지금 공부는 커녕 책 한자 떠들어보지 못하고 보내는 날들이 더 많다. 아무리 계획하고, 준비하고, 예상해봐야 내가 원하는대로 되는게 절반이나 될까.

팀에서 불미스런 일을 겪고 나는 타팀으로의 전배를 대기중이다. (내가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는 역시 생각지도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룹사 모팀에서 나를 좋게보고 인사팀에 나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했단다. 물론 나도 그 팀의 일이 맘에 들었고, 가고 싶다는 어필을 했다. 인사팀은 모든 걸 검토해보고 결정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뭐 그쪽도 원하고, 나도 원하는데 갈 수 있는 확률이 높겠다 싶었다. 나는 이번 기회에 커리어를 바꿔보자는 생각으로 이것저것을 뒤져보고, 김칫국을 사발채 퍼먹으며 장미빛 미래를 상상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말했지 않는가.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오늘 메신저를 켜자마자 나의 영입에 힘쓰고 있던 컨설턴트는 다짜고짜 'ㅜㅜ'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생각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왜, 뭐, 왜, 왜때문에 불안한 예감은 틀린적이 없는지. 


'우짜죠 대리님' 

'안녕하세요 부장님, 왜 눈물을...' 

'사장님이 깠대요. XX에 사람 못보낸다고 하셨다네요'

사장님? 사장님이 거기서 왜 나와.

'어제 인사팀에서 보고를 드렸는데 사장님께서 반대하셨다고 그러네요 저희쪽 상무님이.'

니기미 ㅈ됐네.

'ㅈ됐네요ㅎㅎㅎㅎ'

'다른 사람이면 어떻게라도 해보겠는데 C사장님이 그렇게 반대하셨으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역시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요ㅎㅎ'


일장춘몽도 아니 일초춘몽이라고 해야 맞지 싶다. 아무튼 그렇게 내가 가고싶던 팀으로의 전배는 물건너 갔다. 이제 어떤 옵션이 남았나 헤아려 보았다. 수출 비중이 미미한 현기갑질을 육탄으로 받아내야하는 부서. 수출비중이 미미한데다 매출도 없고, 답도 없는 부서. 젖과 꿀이 흐르는 지원 부서엔 자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생각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걱정한다고 한다고해서 걱정하던 일이 꼭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설령 일어난다고 해도 그게 또 어떻게 전개될지는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성실하게 임하는 것뿐. 다만 이제 좀 다른 마음가짐이라면 또렷하게 내 목소리를 좀 내야겠다는 것. 그러면 기회가 또 오겠지. 그래도 올해는 내 능력을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게 소득이라면 소득이다. 

'X 과장이 그러는데 대리님 스마트한 거 윗분들도 아시는 거 같다고 하던데요' 

빈말이라면 칭찬으로 듣고, 진짜라면 믿고 가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