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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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공간/나의 20대

스물 네살.

영원한 화자 2016. 2. 21. 01:27


빠이팅이 넘쳤다. 전역하자마자 지금의 여자친구에게 고백을 했다. 결과는 성공. 모든게 빠이팅이 넘쳤다. 그땐 그랬지. 후훗. 전역 후 바로 모 시민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수강했다. 군대에서 이것저것 책을 많이 읽었더니 대가리만 커졌다. 사회 운동을 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런 행동으로나마 나를 정당화 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나의 정치관에 일부 영향을 끼쳤으나 한국 시민운동이 가지고 있는 영세함과 막연함을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활동은 학기중까지 이어졌지만 목적이 모호해서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공부에도 빠이팅이 넘쳤다. 여느 복학생처럼 의욕게이지는 언제나 가득차 있었다. 교내활동 교외활동 참 많이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고 부질없다. 몸만 엄청나게 바빴지 학점은 뭐 그렇게 좋지 않았다. 해외에는 나가봐야겠는데 돈은 없고, 부모님에게 기대고 싶지도 않고 해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생각해냈다. 도서관에서 관련된 책을 몇권이나 보면서 혼자 겁나게 설레어 했던 기억이 난다. 혼자 열심히 서류를 준비해서 결국 비자를 받았다.


24살에는 알바도 참 많이 했다. 정동에 있는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 주자창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싸제차를 몰아본 경험은 없었지만 군대에서 운전병을 했던게 도움이 됐다. 덕분에 지금도 주차는 기가 막히게 한다. 회관에 일하시는 분들이 참 좋아서, 비신자인 나에게 형제님 형제님 하면서 맛있는 것도 많이 주셨다. 그때 회관에 자주 오시던 나이가 지긋하신 어머님이 계셨는데 안내를 해드리거나 키를 받으러가면 항상 고맙다,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셨다. 나이도 어리고, 아무래도 주차장이다보니 나를 하찮게 보거나 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어머님의 행동이 참 좋아보였고, 감사했다. 그 이후로 나도 식당을 가든 편의점을 가든 일하시는 분들에게 항상 감사하단 말을 건넨다.


캐나다 출국을 확정짓고나서는 역시 돈이 필요했다. 내가 찾은 알바는 한국예탁결제원! 여의도 입성! 알바 주제에 여의도로 일하러 온다는 게 참 뿌듯하고 내가 뭔가 된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았다. 증권대행 업무를 하던 팀에서 일했는데 주요 업무중 하나가 배당, 증가, 감자 관련 통지서/안내서를 보내는 일이었다. 삼성의 오너 일가와 임원들이 받는 배당금액을 그때 처음 알았다. 자본주의를 느낀 순간이랄까. 주식투자는 그때 연을 맺었다. 그게 지금까지 이어질 줄이야. '사람은 자신이 보낸 시간과 결코 이별할 수 없다'는 어느 소설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집 때문에 고생을 많이했다. 원룸 계약 기간이 끝나고 갈곳이 없었다. 결국 내가 찾아낸 것은 피터팬 카페의 하우스메이트. 뭔가 남자셋 여자셋, 혹은 논스톱같은 것을 상상했지만 내가 살게 된 집은 뭐랄까, 세상에 이런일이 혹은 그것이 알고싶다에 나올만한 몰골이었다. 급한맘에 대충보고 구했더니 그런 날벼락이. 그때를 회고하며 쓴 글도 있다. (http://kulbeatz.tistory.com/70) 한 달만에 그집을 뛰쳐나와서 살게된 집은 대학 선배의 집. 같이 사는 사람만 바뀌었지 주변 환경은 변한게 없었다. 나는 비흡연자이나 그 형은 상당한 끽연가였고, 술을 참 많이 마셨다. 말하자면 사연이 길지만 참 캐나다 가기 전까지 집없는 설움을 많이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