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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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한국 문학 그리고 표절(부제 : 창작과 비평 가을호 리뷰)

영원한 화자 2015. 11. 23. 01:21



* 이 글은 창작과 비평사로부터 계간지 창작과 비평 전자구독권을 지원받아 쓰는 글임을 밝힙니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사태 이후 적지않은 시간이 흘렀다. 이응준 작가의 글은 충격적이었으나 문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공공연한 비밀로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론 드디어 터질게 터졌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 이러다 또 유야무야 묻힐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네이버에 '신경숙'을 넣고 검색해보자. 연예인들의 마약 사건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떠들어대던 언론은 입을 닫았다. 봇물터지듯 나오던 기사는 지금은 가뭄이 맞다는 듯 말라버렸다. 내 뻔한 생각은 뻔하게 맞았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건들을 표절이라도 한듯 이 표절 시비도 당연히 대중의 뇌리에서 잊혀졌다.


 논란의 중심에있는 창비사의 계간지 '창작과 비평 2015년 가을호'에서는 이 문제를 '긴급 기획'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부족하다. 한참 부족하다. 정말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고자 한다면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다 할애해서라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다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표절문제를 다룬 글이래봐야 편집주간의 책머리 글, '긴급기획'으로 포장된 글 세 편이 전부다. 오히려'특집'인 '시대 전환의 징후를 읽는다'에 대한 글이 4편이 실려있다. 논란의 불씨를 키운 주체이며, 문학권력 논쟁의 정중앙에 있는 출판사가 가진 깜냥이 이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에 실망할 따름이다. 편집주간 백영서는 '작가가 '의식적인 도둑질'을 했고 출판사는 돈 때문에 그런 도둑질을 비호한다고 다죄하는 분위기가 압도하는 판에서 창비가 어떤 언명을 하든 결국은 한 작가를 매도하는 분위기에 합류하거나 '상업주의로 타락한 문학권력'이란 비난을 키우는 딜레마를 피할 길이 없기에 저희는 그동안 묵언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바탕 폭풍우가 휘몰아친 뒤에 발간된 자신들의 매체에서 조금 더 깊고 폭넓게 이 사안을 다뤘어야 했다. 잔뜩 혼이 난 초등학생이 건성으로 쓴 반성문을 보는 심정이다.


 '긴급기획'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보자. 총 3편의 글이 실렸다. 일단 이것먼저 말하자. 신경숙에 대한 지지든 비판이든간에 창비 편집위원들의 의견이 실렸어야 했다. 없다. 3편의 글 모두 다른 평론가들의 토론회 발제문을 다듬은 글이다. 예민한 사안이라 안팎으로 원고를 받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내부자들의 입장표명이 필요한게 아닌가. 정공법이 필요한 타이밍이었다. '창비'라는 소속을 차치하고서라도 한국 문단에서 큰 몫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사안에 대해 글을 아끼는 것은 대단한 직무유기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창비 편집위원은 여기서 확인 가능하다. 10월이 되서야 김종엽(표절과 자비의 원칙), 황정아(표절논란, '의도'보다 '결과'가 본질이라면)가 각각 한겨레와 창비주간논평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관련 글은 이곳에서 확인 가능.)


 첫번째로 실린 정은경 평론가의 글(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하여)은 표절이라는 생각을 밝히면서도 비교적 중간자적인 입장을 취하며 사안을 정리한다. 논란이된 작품들과 신경숙 작가와 작품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고자 한다면 이 글을 읽는 것을 추천한다.  

 두번째 김대성의 글(한국문학의 '주니어 시스템'을 넘어)은 신경숙과 표절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기보다는 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된 한국문학의 구조적인 문제를 논한다. 제목처럼 한국 문학 내에서 올바른 '비평'이 이루어지지 않는 원인으로 평론가 세계의 '주니어 시스템'을 언급한다. 소위 '될성부른 나무'들은 유력 출판사들로부터 입도선매되는데, 이는 '더 넓은 필드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조직화된 구조에 소속'되어 '한층 폐쇄된 영역에 놓이게'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결국 한 조직에 소속된 전도유망한 젊은 평론가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긋지긋한 인정주의를 답습하게 되고 펜끝이 무뎌진다는 얘기다. 김대성은 이를 '답정너'의 구조에 가깝다고 말한다. 주례사 비평이 만연한 것도 이와 연관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작품에 대한 비평의 답은 정해져있으니 신진 평론가인 너네들은 대답만해, 안타깝게도 내가 예를 들지 않아도 이런 글은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세번째는 윤지관의 글(문학의 법정과 비판의 윤리. 신경숙을 위한 변론)이다. 창비 편집자는 의도적으로 세가지 시각을 배치했다고 본다. 신경숙의 <전설> 표절이라는 정은경의 글과 표절문제가 '잉태'된 한국 문학계의 구조적인 문제를 짚은 김대성의 글, 마지막으로 바로 세번째 신경숙을 위한 변론인 윤지관의 글이다. 사실 이 글은 싣지 말았어야 하는 글이다. 한 마디로 변호인을 잘못 골랐다. 윤지관의 일부 주장에는 수긍이 간다. 신경숙 표절 사태가 여론재판으로 끝나서는 안되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신경숙의 다른 작품들까지 평가절하 당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는 점에서는 말이다.


 문학에 있어서 차용과 변형 그리고 그것에 대한 표절 여부의 판단은 개인마다 얼마든지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쿠데타는 성공해도 쿠데타지만, 표절은 성공하면 뛰어난 작품으로 변신한다. 그것이 정치와는 다른 문학의 마술이며 내가 엘리엇과 더불어 "작가들이여, 흉내에 그치지 말고 더 크게 훔쳐라"라고 말하는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라는 주장은 엘리엇이라는 권위에 기댄 섣부른 주장이라고 본다. 성숙하게 뿌리내린 문화라면 모를까 이번 사태조차 제대로 소화하고 반성하지 못하는 가운데 '성공적인 표절'이 한국 문학에서 과연 가능한 일인지 반문하고 싶다.

 

 이 글이 실리지 말았어야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문학 권력론 비판' 꼭지 때문이다. 윤지관은 신경숙 표절사태가 신경숙 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계 전체의 타락으로 비화된 데는 '문학권력 비판에 앞장서온 일부 평론가들의 역할이 컸다'고 진술한다. 그들이 '침묵의 카르텔'이니 문학권력의 횡포', '상업주의에 물든 출판권력' 등 무차별적인 비난을 쏟았고 이것이 신경숙 사태가 여론재판에 회부된 주요 이유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까지는 윤지관이 '문학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알겠으나 '문학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니, 그렇다면 이 작가들을 다 어떻게 하고 문단을 재편하겠다는 것인지?', '지금 그 힘을 억압적 권력으로 환원시켜서 해체의 대상처럼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을 권력투쟁으로 이해하는 이들의 좁은 시야를 말해준다. 그것이 대두분 대학에 자리잡고 있는 교수이자 평론가라는, 또다른 '문학권력'들로  부터 주로 나오고 있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렇게 권력해체가 중요하면 대학이야말로 사학권력들이 노골적인 횡포를 부리는 곳이 아닌가? 그나마 저항의 거점이기도 한 문학권력을 비난하고 그 해체를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존재기반을 흔들어대는 사학권력 해체를 위한 실질적 싸움부터 시작할 것을 권하는 바다'와 같은 서술은 과연 평론가의 글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말꼬투리 잡기와 논지 흐리기다. 주관적인 느낌이겠으나 해당 글을 읽는 내내 "아몰랑, 표절 아닌데, 니네 미움. 흥칫뿡!"의 태도가 일관되, 문학권력 논자들의 주장이 자가당착에 빠져있는 궤변이라고 주장하는 필자의 글치고 고개를 끄덕일만한 주장이나 근거도 없다. 찬양에는 성공했을지 모르겠으나 변호인을 자처한 것 치고 '변호'로써의 기능은 전무했다. 오히려 고도의 디스같은 느낌. 차라리 논쟁적일지라도 김종엽과 황정아의 글을 싣는게 백번 나았다.

  

 내 책장의 절반은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 지성사, 문학과 사상사의 책들로 채워져있다. 내 독서 경험의 절반 이상은 앞서 언급한 4개의 출판사들의 책일테고, 성인이 되고 내 생각을 바로 세울 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창비는 내가 처음으로 사서 본 계간지이며, 창비가 제작하는 두 팟캐스트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든 에피소드를 들은 애청자이기도 할 만큼 나는 창비의 지지자다. 이번 호를 읽을 수 있었던 전자구독권 또한 '책읽는당'이라는 창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지원받게 되었다.

 

 그러나 신경숙 표절사태 이후 창비의 행보는 너무도 실망스럽다. 어설픈 보도자료와 논란을 확대시킨 행태들은 과연 내가 알고있는 창비인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 실망은 이번 창비 가을호에서도 여전하다. 이번 호에 표절문제를 다룰 것이라 생각했고 창비의 입장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시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긴급기획'이라는 네 단어는 독자인 내가 쑥쓰러울 정도로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꾸겨 넣은 기색이 역력한 '기획'이다. 사태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장비가 이 문제를 정공법으로 풀고나가지 않는다면 이번 사태는 훗날 한국문학의 안타까운 한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여론과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사태가 끝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일부에선 자성의 노력과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내 시각에서 그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비주류 평론가들과 논객들이다. 김대성이 말한 '주니어 시스템'에 속해 있지 않아 비판과 표현의 속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창비, 문학동네의 편집위원이 자신들의 출판사에서 책을 낸 작가들을 '저격'하기는 힘든 노릇이라는 건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한국 문학의 위기', '비평의 위기'에서 탈출 하려는 큰 한 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건이 한국 문학과 비평계가 한층 더 성숙한 계기가 되기만을 바란다.



*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태와 관련해 읽어볼만한 글과 책을 남깁니다.


 - '신경숙 표절' 파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시사인


 - '신경숙의 남편'과 '비평가' 사이. ㅍㅍㅅㅅ

   주. 나는 이번 사태를 통해 문학동네에도 엄청난 실망감을 느꼈다. (이후 문학동네는 출판사 대표를 비롯해 모든 편집위원이 퇴진했다.) 특히 두루뭉술하고 모호한 신형철의 서술은 그야말로 안타까웠다. 평소 날카로운 글을 쓰지 않는 그였으나 이 사안만큼에서는 날카롭길 바랐다. 남진우와 같은 곳에 소속된 편집위원이라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겠지. 


 - 신경숙 남편 "표절은 문학의 종언이 아니라 시작". 한겨례

  주. 이거슨 올해의 궤변 of 궤변 후보. (신경숙 남편=남진우 평론가=문학동네 편집위원)


- 창비 편집위원들의 글을 읽고, '누가 거친 비판을 하는가'. 권성우 평론가


- 반성 없는 문학권력, 다시 돌아본 신경숙 옹호론. 미디어 오늘


- <<문학권력>> 강준만, 권성우

 주. 문학권력의 촉발과 진행을 다룬 책이다. 관련된 논쟁들을 강준만 교수가 귀신같은 '인용술(!)'로 편집해냈다. 권성우 평론가의 글이 보론격으로 들어가 있다. 어디엔가 이 책을 읽고 감상문을 남겨둔 것으로 기억하는데 보이질 않는다. 여하튼 '문학권력' 논쟁을 한 번에 보기엔 이 책이 가장 좋을듯 하다.



- <<비평과 권력>> 권성우

 주. <<문학권력>>을 읽고 읽은 책으로 기억하고 있으나 몇 년 된터라 내가 이 책을 읽었는지 아닌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사실 그의 책 <<낭만적 망명>>과 헷갈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챕터를 보아하니 맞는것도 아닌것도 같지만 '문학권력' 논쟁의 맥락에 있는 책이니 남겨 놓는다.



P.S 


다섯 시간이나 들여 이런 글을 썼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으면서 슬프다. 나의 창비가, 나의 문학동네가, 나의 신형철이... 무심코 훑어보니 지금도 책상 위에 문학동네와 창비의 책이 놓여있다. 애착이 애증으로 바꾸는 것도 순식간이구나. 써놓고보니 창비가 이따위 평을 듣자고 공짜 구독권을 준게 아닐텐데, 싶다. 내가 이럴진데, 월급을 주는 자기 회사(출판사)를 공적인 자리에서 깔 수 있는 평론가들이 어디있겠나. 말이 쉽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렵다.

 

 인터넷 서점에서 학습서를 사면서 시집을 사려다 고민끝에 시집을 장바구니에서 뺐던 4년 전의 일기를 봤다. '시집? 21세기에? 백수가?'라고 썼다. 오늘은 이렇게 쓴다. 문학? 문학권력? 21세기에? 백수가? 슬픈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