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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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로운 공간/나의 20대

스물두살.

영원한 화자 2014. 12. 28. 22:46

스물두살.


1월 15일, 나는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입대 전날엔 새벽까지 수취인 불명을 봤다. 왜 그 영화를 봤는지는 모르겠다. 훈련소 앞은 북적북적 했다. 이런저런 행사도 있고. 짧게 깎은 머리는 영 바보같았다. 연병장으로 내려오라길래 내려갔는데 난 그게 부모님과 헤어지는 순간인줄 몰랐다. 그렇게 얼레벌레 경례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치르고 생활관으로 들어갔다. 연병장 모퉁이를 돌자마자 고막을 휘감는 씨발 소리. 분명이 현실이 맞는데 현실아닌 현실같은 현실이랄까. 전투복 야상에 목이 쓸리고, 아무것도 없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을 느끼며 만지작 거리고, 딱딱한 전투화에서 발은 헛놀고. 그 와중에 이곳저곳에서 보이는 초중고 동창놈들ㅋㅋㅋ,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다 싶었다. 우린 모두 꿈을 꾸는 것 같았지만, 겨울 바람 처럼 살을 에는 현실이었다.


훈련소에서 나는 조교를 지원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도 않았고, 조교를 하면 휴가도 많이 준다길래. 단지 그뿐이었다. 체력시험도 보고, 면접도 4번 정도를 본 것 같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 우수한 성적으로 훈련소장 면접까지 통과했다. 내가 있던 교육대 조교들은 내가 불침번을 설때 찾아와서 니가 xxx냐고 물으면서 누나는 있는지, 축구는 잘 하는지 물었다. 당연히 나는 조교가 되는 줄 알았다. 나는 그때 다른 특수보직 차출대상이었는데 -내가 뭐 잘나서 그런게 아니라 대학생들을 그런식으로 많이 차출했다- 훈련소 시스템상 훈련소 조교 전형(?)에 있는 훈련병들은 모든 차출에서 제외됐다. 조교를 한다고 깝쳤던게 재앙(?)의 시작이 될지 몰랐다.

 당시에는 훈련소 수료 당일에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게됐다. 훈련병들중 논산훈련소 내에 배치가 되면 '자충'이라고 불렸는데 내 이름은 '자충'에 불리지 않았다. 훈련소 조교 선발에서는 훈련소장 면접까지 120%를 뽑아놓고 나머지 20%를 무작위 추첨으로 버리는데 그 20%가 나였다. 오! 그럼 나는 특수부대로 가는건가? 라는 착각을 하고 있을쯤, 조교가 떨어뜨린 종이를 봤는데 거기엔 훈련병들이 내려야할 기차역 목적지가 써 있었다. 내 이름 뒤에 적혀 있는 남춘천역. 뭔가 불안한 기운이 엄습했다.

 연무대역에서 기차를 타고 끝없이 달렸다. 대전을 지나고 서울을 지나 엠티로 갔던 청평역에서도 나를 내려주지 않았다. 방향을 꺾은 기차는 결국 종착역인 남춘천역에 다달았다. 그 검은 기운이란. 수도 없이 많은 훈련병이 이미 집결해 있었다. 버스를 타고 102보에서 3일을 대기했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15사단이라는 걸 알게됐는데, 거기는 그러니까 화..화천. 내가 2년 동안 머물러야 할 곳은 화천이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또 일주일을 머무르자 누가 나와 내 동기를 태우러왔다. 굽이굽이 길을 돌아돌아돌아 어딘가로 돌아갔는데 길옆에 건물 높이로 쌓인 눈이 나를 환영했다. 그리고선 어디 창고같은 건물로 날 끌고 들어갔는데 그곳이 내가 2년 동안 지낸 막사였다. 나중에 60년대에 같은 부대를 전역한 선배님들이 왔는데 "그때랑 하나도 안 변했네"하며 감탄을 하시기도 했던 그 막사. 1960년대에 지어진 그 막사.


 나의 주특기는 2814. 특수차량운전병. 그 중에서도 견인. 아, 꿀좀 빨았겠구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155mm 견인포도 이 면허가 있어야 한다. 즉, 나는 견인포 운전병이었다. 근데 나는 후반기 교육을 받지 않고 자대에 갔다. 수송관은 나에게 "너 왜 왔어?"라고 물었다. 가라니 왔지, 내가 오고 싶어왔겠냐,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다. 알고보니 전산오류로 나랑 같은 특기를 받고 전국에 뿌려진 훈련병들은 후반기 교육도 받지 않고 자대로 간 것. 결국에 일병을 막 달고 3주간 대전 자운대에 가서 교육을 받았다. 꿀맛같은 기억.


 우연한 인연도 있었다. 논산에서 종교행사를 마치고 줄을 서 있는데 누가 아는체를 하며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학교 후밴가해서 학교 이름을 댔으나 모두 아니었다. 알고보니 대학교 때 잠깐 사귄 친구의 친구의 남자친구. 그렇게 말하니 기억이 났다. 근데 그 친구를 다시 대전에서 만났다. 부럽게도 그 친구는 자운대에서 복무중이었다. 이때 쯤 부터 인연의 무서움, 그리고 세상이 참 좁다, 어디서 누굴 만날지 모르고, 누가 누구의 누구일지 모르니 행실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화천으로 돌아온 나는 매일 같이 일만해서 일병이라는 일병 생활을 했다. 한없이 덥고, 한없이 추운 화천의 여름과 겨울을 보내고 상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