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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할 것/갱제

소로스의 공격.

영원한 화자 2013. 4. 12. 15:54

요즘은 갱제학 공부하는 맛에 산다.

그러나 미시와 그래프는 토나온다.



헝가리 출신의 미국인 사업가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퀀텀펀드(Quantum Fund)를 설정한 때는 1969년이었다. 1992년에 그는 이미 억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세계 최고의 투자자라는 명성과 함께 활발한 자선사업으로 명망도 높았지만, 금융적 야망과 함께 지적인 욕망을 가진 인물이자 세상이 자신의 사업적 수완만큼 철학적 견해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주기를 바랐던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소로스 자신도 말했듯이 그는 돈만 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명성도 쫓을 수 있는 비즈니스 기회를 찾아 나섰다. 사업과 무관한 프로젝트들을 추진할 때 활용할 수 있는 대중적 명성을 원한 것이다.


그해 여름, 드디어 그는 영국에서 기회를 발견했다. 영국은 1990년 유럽통화제도(EMS)의 환율조정체제(Exchange Rate Mechanism, ERM)에 가입했다. ERM은 유럽단일통화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 일종의 고정환율 체계였다. 그러나 영국은 이 체계에 가입함으로써 따라야 하는 통화정책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에는 아직 유럽중앙은행이 없었다. 국가들 사이에 가상의 법적 기준을 마련해놓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Bundesbank)의 통화정책에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입장이 달랐다. 막 재통일을 이룬 상태였기 때문에에 동독의 재건에 막대한 돈을 써야만 했다. 이러한 지출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일어날 것을 우려한 분데스방크는 자국의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썼다. 한편, 안 그래도 너무 높은 환율로 ERM에 가입한 듯 보였던 영국은 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고,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영국 관리들은 ERM 탈퇴 가능성을 강하게 부인했지만 정말 그렇게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의 목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통화위기가 일어나기에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소로스는 여기에 베팅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위기를 스스로 촉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베팅의 역학이란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매우 복잡하지만 개념상으로는 단순한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에 소로스는 별로 눈에 띄지 않게, 심지어는 은밀히 움직였다. 컨텀펀드는 150억 파운드를 빌릴 수 있고, 또 이 돈을 마음대로 달러로 바꿀 수 있는 신용한도를 조용히 확보했다. 그런 다음, 달러에 대해서는 롱포지션을 파운드에 대해서는 쇼트포지션을 취하고 나서 시끄러운 공격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소로스는 파운드화 공매도에 대해 최대한 드러내놓고 이야기했다. 각종 경제신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파운드화 절하가 임박했음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예상대로 진행된다면 다른 투자자들의 파운드화 투매가 이어질 것이고, 그러면 영국 정부로서는 항복하고 평가절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파운드화에 대한 소로스의 공개적 공격은 8월에 시작되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영국은 파운드화 방어를 위해 외환시장에서 약 500억 달러를 쓰면서 고군분투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9월 중순에 영국 정부는 이자율을 올려서 통화를 방어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사흘 후 영국은 ERM에서 탈퇴, 변동환율제로 선회했다.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소로스는 대략 10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기꾼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의 『불황의 경제학(The Return of Depression Economics and The Crisis of 2008)』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