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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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이라는 정치의 환상

영원한 화자 2012. 1. 15. 15:16
나중에 읽으려고 일하다 퍼옴. 출처는 한겨레.


<무한도전>에 대한 예찬이 한창이다.
 설령 ‘무도빠’(<무한도전> 마니아를 일컫는 말)가 아니더라도 <무한도전>이 뿜는 매력에 시청자는 탄성을 자아내곤 한다.
 새로운 캐릭터가 탄생하거나 새로운 미션이 수행되거나 새로운 풍자가 전파를 타면, 인터넷 ‘찌라시’들은 거의 실시간으로 이 사실들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젖꼭지가 아래에 있는 유재석과 장가를 못 가는 정준하, 또는 ‘스피드’ 특집과 ‘TV 전쟁’ 특집, 또는 형광등 100개를 켠 듯한 미모와 열악한 조건의 택배 노동 등.

물론 <무한도전>이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제공한다는 세간의 평은 옳다.
 시청자와 소통하고 연기자들의 진정성을 보여준다는 평가 또한 옳다.
 <무한도전>은 분명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심지어 권위를 조롱할 정도의 대담한 풍자 정신마저 보유하고 있다.
 흔한 말마따나, 우리는 토요일 저녁 <무한도전>을 보면서 일주일간의 스트레스를 푼다(그리고 을 보면서 다음 한 주를 견디는 힘을 얻는다).

그러나, 언젠가 담당 연출자 김태호가 말했듯이, <무한도전>이 과잉소비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와 더불어 컬트적 경배 역시 과잉생산되고 있다.
 아마 이런 과잉은 지금의 신권위주의 시절에 이 프로그램이 지니는 정치적이고도 문화적인 적실성 때문일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개그콘서트>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aturday Night Live)가 그러하듯, 어떤 진지한 웃음거리를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무한도전>은 그런 시대적 요청에 대해 단순한 부응을 넘어, (풍자와 패러디로 집약되는 것처럼) 오늘날 정치를 이해하고 상상하는 특정한 방식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정형의 예측불가능성
우선 <무한도전> 자체를 이해해보자. 이 프로그램만의 매력은 무엇일까. 다소 동어반복이긴 하지만, (구글에서 ‘무한도전+왜+인기’로 검색해보니) 대다수 블로거들은 <무한도전>을 이렇게 평가한다.
 ‘진실을 담아 대중의 삶을 재현했다’, ‘단순하거나 말초적이지 않다’, ‘일방적 주입식으로 가치를 세뇌하지 않는다’, ‘시청자를 단순 소비자가 아니라 참여하는 수용자로 대우한다’…. 물론 무도빠가 아니라면 이런 평가에 반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그네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이와 같은 무한 신뢰의 배경에는 <무한도전>만의 무정형성이 있다.
 고정 출연자 7명은 굳이 남자의 자격을 갖출 필요도 없고 1박2일로 여행을 할 이유도 없다.
 마찬가지로, 반드시 짝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으며 누군가를 추격하는 런닝맨이 될 숙명도 없다.
 그런 까닭에 <무한도전>은 우리네 삶의 무목적성을 충실히 재현할 수 있으며, 단순해 보일지언정 그저 그렇기만 한 단순함 따위를 훨씬 넘어선다.
 또한 거북해 보일 정도로 어떤 특정한 가치를 주입할 소지가 적고, 반대급부적으로 생산되는 여백을 채우기 위해 시청자의 의견을 계속 담을 수밖에 없다.
 정해진 형식이 없음으로써 모든 형식을 담아내는 것이다.


세부적 배치에서도 완결적 구성을 보이긴 마찬가지다.
 주지하듯이 <무한도전>에는 몇 달치의 장기 프로젝트와 그 사이에 배치되는 단기 프로젝트들이 섞여 있다.
 여기서 모니터를 통해 시청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무엇일까. 시청자의 반응을 보면 두 포맷에서 각기 다른 감각이 형성된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조금 단순히 말하면, 매주 바뀌는 포맷에선 재미를, 장기간 계속되는 포맷에선 감동을 느낀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은 판단이 그저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무한도전>은 재미와 감동이라는, 오늘날 예능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제공한다.
 이런 소통의 재미와 진정 어린 감동은 서로 합력함으로써 이 프로그램을 일종의 완전체로 승격시킨다.
 <무한도전>은 예능 이상의 프로그램이자, 차라리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다.
 <무한도전>은 표준화되는 모든 형식을 거부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무한도전>은 말 그대로 무한하게 자기증식한다.


이런 특성은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면면이다.
 그렇기에 <무한도전>에서는 과거 문화산업론 추종자들이 비판하던 결정화 표준화 획일화와 같은 전체주의적 혐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 자체가 이미 전체 아니던가. 어쩌면 이 프로그램은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형식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음주 예고’를 보지 않는 한, 우리는 <무한도전>에서 무엇을 보게 될지 감히 예측할 수 없다.

 
‘쿨’로 무장한 문화적 민주화
그런데 이런 형식의 부재와 그로 인한 역설적 완결성이 그다지 새로운 양식만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깊이를 평탄화하고 권위를 조소함으로써 대중예술을 선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그동안 숱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있었지만 내용적 형식적으로 <무한도전>만큼 포스트모더니즘의 덕목과 맞아떨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형식적 완결성을 강제하는(혹은 강제받는) 기존 문화산업과 달리, 이 프로그램은 그 모든 강제로부터 자유로움을 선언한다.


이뿐만 아니라, 요소요소에서 강조되는 ‘쿨 애티튜드’는 우리 시대의 에토스를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어떤 압력으로부터의 초연함을 의미하는 ‘쿨’이라는 정서는 권위주의에 반역하는 정신으로 이해되곤 한다.
 어떤 칼럼니스트는 <무한도전>을 두고 ‘대안세대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것으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그 대안성에 대한 숙의를 잠시 유보한다면 이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쿨 가이’ 정준하와 할 말 하는 박명수는 권위에 주눅 든 ‘찌질함’과 대비되어 오늘날 젊은 세대가 어떤 윤리적 자세로 무장해야 할지 제시하는 꼴이 된다.


그로써 모든 규정하는 것들은 해체해야 할 대상이 된다.
 아나운서나 쓸 법한 ‘바른 말 고운 말’, 경고 조처를 남발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도덕적 엄숙주의로 점철된 ‘문화보수주의’, 심지어는 ‘법 그 자체’까지. <무한도전>은 기존의 상징적 아버지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굴종을 그치고 조롱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종종 자신이 문화적 민주화에 기여한다고 주장해왔는데, 우리 시대에 <무한도전>이 이해되는 방식도 바로 이 지점과 직결돼 있다.

 
정치적 상상력의 분열증적 동요
단기 프로젝트에서 시청자는 매주 혹은 격주로 새로운 프로그램과 업그레이드되는 캐릭터들을 보는 셈이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이 과정에서 시청자가 <무한도전>과 소통하는 느낌을 받는다는 점에 있다.
 이 소통성은 단순히 야외촬영 중간에 시민들이 카메라 프레임 안에 들어온다는 사실을 넘어선다.
 이미 이 프로그램은 미션 선정이나 포맷 결정 과정에서 시청자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거나 참조하고 있다.
 그러니 재미의 외연이 확장되는 셈인데, 이 순간 시청자는 <무한도전>에서 형식적 민주주의와 유사한 어떤 것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장기 프로젝트에서 시청자는 연기자들에게서 진정성을 느낀다.
 댄스스포츠, 에어로빅, 봅슬레이, 프로레슬링 등 말 그대로 무모하고 무리한 장기 미션을 준비 실행하는 과정을 통해 연기자들의 신체적 고통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거의 여과 없이 시청자에게 전달된다.
 물론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통해 얻는 관음증적 쾌락일 테지만, 그 쾌락이 충족될 즈음 시청자는 연기자들에게 ‘진정성’이란 작위를 수여할 수밖에 없다.
 이로써 감동의 내포마저 심화되는데, 그와 동시에 실질적 민주주의에 준하는 어떤 것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무한도전>이 표방하는 예측불가능성은 어쩌면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쿨 애티튜드 또한 마찬가지다.
 형식과 권위를 죽이는 과정을 감내하기 위해 쿨은 반드시 필요한 심적 자원이고, 그 결과 도달하게 되는 세계는 어떤 문법도 가지지 않은 채 불확정성의 원리에 따라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간과해선 안 될 논점이 하나 있다.
 <무한도전>을 통해 대다수 시청자가 유사민주주의를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정치를 이해하고 상상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무한도전>에 민주주의적 가치가 있다는 믿음은, 무엇보다 이 프로그램이 정치적 풍자와 패러디에 능하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연출팀이 전적으로 의도했다고 보기 어렵지만 어쨌든 <무한도전>에는 풍자적 요소가 즐비하다.
 박명수가 국밥을 먹는 장면에 깔린 ‘박명수는 배고픕니다’와 ‘예능을 살리겠습니다’ 같은 자막은 정확히 이명박과 경제를 지시한다.
 국밥을 먹기 위해 입을 쩍 벌린 박명수의 표정은 희화화되고, 이에 따라 웃음이 터진 시청자는 현 대통령에 대한 조소에 동참하게 된다.
 이로써 소통 불가능한 제도정치는 대중에게로 끌어내려져 민간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덧붙여, 또 한 가지 정치 형식이 상상된다.
 이야기의 단초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무한도전>에 대해 방송 품위 저해와 간접광고를 이유로 경고 조처를 내린 사건에 있다.
 이 사건은 <무한도전>의 쿨한 언어(말투, 몸짓 등)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적 품행에 어떤 위해를 가했는지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무도빠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방통심의위의 조처가 정치적 검열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풍자와 패러디 때문에 탄압받는 것이라는 일종의 음모를 제기한 것이다.
 사람들은 ‘21세기 예능’에 대한 ‘19세기 심의’라고 이해했다.


두 사례는 <무한도전> 지지자들이 오늘날 정치 형식을 이해 상상하는 데 어떤 난점을 가지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이 이해하는 정치는 권위주의 이후에 오는 것으로서 소통과 진정성이 지배하고 권위가 재분배되는 정치인데, 역설적이게도 어떤 순간에는 음모적 권위에 의해 조종되고 제어되는 정치를 끝없이 상상하고 소환해내는 것이다.
 무엇이 당위로서의 정치이고, 무엇이 현실로서의 정치인지 식별 불가능한 상황인 셈이다.


이것은 꽤나 분열증적인 상황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이명박 정부나 한나라당은 그 모든 음모를 획책한 적대적 상대로서 살해해야 할 19세기적 아버지로 나타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더 많은 소통을 하자며 갈구하고 애원해야 할 21세기적 파트너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가도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읊조리길 반복한다.
 다만 방통심의위의 경고 조처를 역이용한 또 한 번의 패러디를 통해 입증되듯이, 이런 간극은 음모적 권위에 대한 또 한 번의 쿨한 조롱으로써만 보충될 따름인데, 불행하게도 그 대안성이 소통이나 진정성 같은 도덕률에 근거하는 한 <무한도전>의 정치는 재차 분열증적 동요에 빠질 수밖에 없다.

 
정치의 내포와 외연이 축소되는 역설
아마 어떤 이는 웃자고 만든 <무한도전>에 죽자고 덤벼드는 꼴이라며 불편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기존의 권위와 형식에 도전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개념 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또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면, 그것은 당신들 자신이 어떤 형태로든 정치를 필요로 하면서 살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로 그 때문에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한도전>은 매우 값어치 있는 문제작인 것이다.
 여하간, 재미와 감동이 커지는데도 정작 그 동력이라 할 정치의 내포와 외연이 축소되는 역설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필요가 있겠다.


글 / 김성윤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중앙대와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