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화자

<사랑이라니 선영아> - 내가 아는 최고의 연애소설. 본문

사사로운 공간/읽다

<사랑이라니 선영아> - 내가 아는 최고의 연애소설.

영원한 화자 2011. 12. 23. 00:21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주제는 역시 사랑, 그것도 남녀간의 사랑이다. 거기엔 '네박자'의 가사처럼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그리고, 쓰고, 읊으니 어떻게 보면 지루하기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게 이 '사랑'이란 주제다. 
 
 지금은 거의 볼 일이 없지만 어렸을 땐 곧 잘 연애소설을 빌려봤다. 김하인의 최루성 연애소설을 읽으며 눈시울이 시뻘개져 가슴찢어지는 사랑의 아픔을 느끼는가 하면 에쿠니 가오리나 그런 류의 소설들, 예를 들자면 유이카와 케이의 <이별의 말은 나로부터>같은 거창한, 어찌보면 시덥잖은 것들을 탐독해왔다. 그러나 역시 어느 정도 읽는 양이 쌓이다 보면 모든 게 다 부질없고 재미가 없다. 뻔한 스토리 라인에 소금 간 안한 국보다 더 싱거운 결말들, 사랑이 장난이야! (고영욱 톤으로) 외치고 싶은 그런 소설들 투성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건 대학교 2학년 쯤 이었을꺼다. 김연수의 책을 집착적으로 읽어제끼던 나는 내용도 상관없이 이 책을 빌렸다. <사랑이라니, 선영아>라니. 선영이라면, 전국의 수 만명의 '선영이'들을 가슴 설레게 한 광고 카피에 사용된 이름 아니던가. 풋. 두께도 얇으니 뭐 고만고만한 사랑얘기 겠지 하며 책을 펴들었다. 한 톨 만큼의 기대도 하질 않았지만 책 날개에 써 있던 다섯 줄의 대화가 내 온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만 보면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너는 닭고기하고 여자 중에 뭐가 더 좋냐?"
"당연히 여자가 좋지, 임마."
"그럼 넌 어떻게 한 여자보다 닭고기에 대한 사랑이 더 오래가냐?
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학교 1학년 땐가, 영화 속의 철학사상이란 수업에서 '연애의 목적'이란 영화를 봤다. 교수님은 중요한 장면을 편집해 오셨는데-교수님은 정말
'중요한 장면'을  편집해오셨다-그걸 보고 난 뒤 교수님은 우리에게 물었다. "여러분, 연애의 목적이 뭡니까?" 100명이 넘는 인원이 들었지만 우린 열띤 토론을 했다. 뭐다 뭐다. 말이 많았지만 답은 없었다. 물론 교수님도 답을 알지 못했다. 여전히 난 궁금했다. 연애의 목적은 뭐지? 이 책은 내 그런 궁금증에 대한 김연수 식의 해답인 듯하다. 우리가 왜 사랑하는지. 왜 이별하는지.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냐고? 옵바. 그건 옵바가 영원하리라 믿는 낭만적 사랑이 실은 공산품이어서 그런 거야요."  (중략)

"공산품이 뭐야?"  (중략)
"뭐긴 뭐야? KS마크나 '검'자가 찍히는 물건이란 뜻이지. 수제품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KS마크는 안 찍어주잖아?" 면박을 주듯 진우가 쏘아붙였다.
"사랑이 왜 공산품이냐니까 거기서 왜 KS마크가 나와?"
"그건 사랑에도 표준 규격이 있다는 뜻이야. 잘들어봐. 마크코니의 전신, 벨의 전화, 에디슨의 전구, 자본주의 사회의 낭만적 사랑은 모두 역사적인 발명품이야. 17세기 프랑스 사람 라 로슈푸코는 이런 말을 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중략) TV편성표 프로그램 옆에 있는 숫자는 고정간첩의 난수표와 마찬가지고 피임약이 발명되기 전까지 성적 방탕이란 남성명사에 속하는 것이었지. 같은 이치로 18세기에 낭만적 사랑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뛰는 가슴으로 만나 일부일처제 가정을 꾸려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는 없었다는 뜻이지." (중략)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다친 곳도, 피 흘린 자리도 없는데 우리가 왜 실연의 상처에 아파하겠니? 실패한 사랑에는 KS마크를 찍어주지 않으니까 그러지. 낭만적 사랑의 첫번째 테제. 우리는 서로 만나기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KS마크를 받아야만 한다. 두 연인이 일부일처제 가정을 꿀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때, 낭만적 사랑은 최고의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사람들은 믿잖아. 그런데 이게 다 환상이란 말이야. 음모란 말이야. 사실은 18세기 자본가들이 발명한 사랑이야. 낭만적 사랑의 공ㅇ식, 낭만적 사랑의 표준 규격이 그때 다 발명됐단 말이야. 왜 그랬겠니?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안그러면 인간들이 노동을 안하니까. 니가 내 농노라면 채찍만 들어도 수만 평 고랑을 다 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럴 수가 없잖아? 그렇다면 무슨 수로 너를 주당 44시간씩 컨베이어벨트 옆에 세워놓을 수 있겠냐
?" (중략)
 

"...너처럼 쫀쫀하게 몽그작 거리는 애를 평생 매일 아침 9시까지 증권회사 석계 지점으로 출근하게 만드는 일은 병장이 이등병 머리박게 하는 것보다 더 쉬워.
니 주민등록초본 아래로 줄줄이 이름을 등재시키면 되는거야. (중략) 이 지경이 되면 채찍을 보여주지 않아도 자본주의라는 말은 이 거대한 바퀴를 굴리기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든단 말이지."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많다.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고, 인간의 심리와 행동을 파헤친 과학일 수도 있으며, 자신의 오랜 고찰에서 비롯된 철학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연수의 '사랑론'은 다르다. 제법많은 사랑론을 읽어봤지만, 김연수와 같은 보편적(물론  내 주관적인 보편성이다)이며, 유쾌한 '사랑론'은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 사랑이야기는 자칫 진부하게 흐를 수 있으나 만남, 이별과 같은 사랑얘기에 필연적 요소를 쓰지도 않은 채, 자못 지적이며, 한 편으론 유쾌하고, 또 한 편으론 통찰력이 빛나는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더불어 끝까지 소설적 재미도 놓치질 않는다.

... 하지만 어떤 어떤 사람을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는 뜻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춤을 추는 일과 흡사하다. 이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 눈에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애정이 없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 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 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 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할 단계는 나이트클럽 플로어를 비비며 강종거리기 바로 직전이다. 다른 사라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연습하게 마련이다. 나이트 클럽 화장실에서 연습하든 , 자기 방에서 러닝셔츠 바람으로 연습하든, 연습할 때는 객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줄 거울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눈이 아니라 '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거울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천산지산 갈라졌던 자신의 정체성을 추슬러 하나의 나로 끼워 맞추는 조련찮은 수고를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온전한 하나의 정체성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사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아, 왜 나는, 아니 우린 왜 사랑을 하는 것일까. 알랭드 보통의 책 제목 처럼.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얼굴이 예뻐서, 성격이 좋아서, 잘 맞아서, 고작 이런 이유라면 우리가 사랑에 대해 보이는 태도들, 그러니까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식음을 전폐하고, 뭐 어떤이들은 손목을 긋거나 하는 행동들은 뭔가 석연치 않다. 김연수의 말처럼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런 것인가. 그렇다면 '널 나보다 더 사랑해'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인겐가.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했지만, 이 책은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얼마간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든다. 하긴. 세상에 몇 사람이나 이 질문에 답을 내리고 눈을 감을까마는, 그래도 '그냥 애들 때문에 사는거지.' 혹은 '이 나이와서 무슨 이혼을 해'라며 억지로 사는건 아니지 않나?




                                     이런 삶도 좋잖아!